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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순열의경제수첩] 건강한 국가관 원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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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5-11-06 20:58:08 수정 : 2015-11-06 21: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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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이 원하는 국가관, 교과서로 만들 수 없어
‘개천 미꾸라지’들에 꿈 펼칠 세상 만들면
건강하고 반석같은 국가관 저절로 생겨
자연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 계절이 순서를 바꿔 올 수는 없다. 역사의 시간은 다르다. 가끔 미친 듯 거꾸로 흐른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증명한다. 5년짜리 정치권력이 수천년 세월의 역사책 만들기에 직접 뛰어들다니. 2015년 가을 한국 사회는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대 한복판으로 돌아갔다.

류순열 선임기자
공안검사 출신 황교안 총리는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국정화 대국민담화에서 사실상 역사학계 99.9%를 ‘좌편향’으로 낙인찍었다. “간첩단 사건 발표 같더라”고 한 건 심상정 의원만이 아니다. 저마다의 기억 저편에 잠자고 있던 ‘공안의 추억’은 거꾸로 흐르는 시간을 부여잡고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 흐름에서 저질의 색깔론도 여지없이 살아나 갈등과 분열의 씨앗을 흩뿌리고 있다. “국정화 반대는 적화통일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 “북한의 국정화 반대지령을 받은 단체와 개인을 적극 수사해야 한다”(서청원 〃) ….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일까. 친박근혜계 인사들이 구사하는 문법을 보면, 박 대통령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념의 허깨비를 만들어 분열을 조장하는 사악한, ‘그런 기운이 온다.’ 박 대통령의 복심(腹心)이라는 이 최고위원은 “국정화를 반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는 말도 했다. 권력에 취해 이성을 잃은 것인가. 뇌구조에 민주주의 개념이 한 조각이라도 박혀 있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과 토론은 불가능하다. 무슨 논리를 들이대든 ‘종북’ 낙인만 찍으려 들 것이다. 외국의 시선을 보여주는 게 차라리 효과적일 것이다. 그들에게까지 마구잡이로 ‘색칠’을 해댈 수는 없을 테니 그저 경청함이 마땅하다. 뉴욕타임스는 일찌감치 한·일 양국을 싸잡아 “두 나라는 교과서를 수정해 역사적 교훈을 부정하려는 위험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영국 BBC는 “역사교육을 통제하는 한국”이라는 표현으로 퇴행적 흐름을 전했다. 망신으로만 끝나는 일이 아니다. 한·중·일 과거사 정리에 악영향을 끼칠 중대한 문제가 될 것이다. 당장 정부의 직접 개입이라는 형식만으로도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비판할 자격에 심각한 결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 학자 군 드 괴스트르(한국학 교수)는 “앞으로 동아시아에서 반성과 화해를 논할 때 어떻게 신뢰를 얻을 수 있겠냐”고 개탄했다.

나오지도 않은 교과서를 두고 시비건다고 하겠지만 꼭 봐야 아는가. 황 총리가 뉴라이트 계열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 채택률이 0.1%인 점을 지적하며 나머지 99.9%를 사실상 좌편향으로 규정한 것만 봐도 방향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일제 지배를 통해 조선이 발전하고 한국 산업화의 기반이 닦였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뼈대가 될 것이다. 이 계열의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최근 방송에서 일제강점기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실려간 것을 두고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라고 강변했다. 무엇보다 부친이 친일·독재자로 기억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박 대통령의 효심이 방향타다.

논란을 딛고 ‘올바른 교과서’가 나온다고 해서 젊은 세대의 머릿속에 정권이 바라는 ‘확고한 국가관’이 생길 리도 없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고 국정교과서로 배우며 자란 과거 386세대는 정작 대학 시절 군부독재에 분노하며 치열하게 반정부 투쟁을 벌이지 않았나. 지금 젊은 세대의 ‘헬조선’ 저주도 편향된 검정교과서가 아니라 미래조차 설계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생겨난 것임을 그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정권이 원하는 국가관은 역사교과서에서 나오지 않는다. 세월호가 침몰해도 국가가 구해줄 거란 믿음을 주고, ‘개천의 미꾸라지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을 만들면 저절로 ‘헬조선’은 사라지고 건강한 국가관이 생길 것이다. 2200여년 전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은 맘에 안 드는 역사서들을 불태우고 비판적인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진시황의 폭정으로 15년 만에 멸망했다. 훌륭한 지도자는 역사를 바꾸고 저열한 권력자는 역사책을 바꾼다는 말은 곱씹을수록 명언이다.

류순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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