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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산복도로에서 본 부산 전경. |
◆산복도로로 이어진 ‘아부지, 어무이’의 삶
일제 때 일본으로 강제징용된 뒤 광복을 맞아 돌아온 이들 중 일부는 부산에 도착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어 전쟁이 터지자 전국의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몰려들었다. 땅은 한정돼 있는데 사람이 넘쳐나면서 피란민들은 몸 뉠 곳을 찾아 산으로 점점 올라갔다. 특히 부산역과 부산항 등 일거리가 있을 만한 곳에서 멀지 않은 데에 삶의 터전을 마련해야 했다. 그나마 빨리 부산에 도착한 이들은 낮은 곳에 정착할 수 있었지만 늦은 이들은 산 정상 부근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부산 하면 떠오르는 모습 중 하나인 산기슭에 빼곡히 들어선 집들은 이렇게 조성됐다.

부산에 가면 어디서든 쉽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막상 그곳을 가보지 않고는 ‘아부지, 어무이’가 살았던 모습을 실감하기 힘들다. 지금은 산 중턱에 있는 이 마을들을 잇는 산복도로가 뚫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갈 수 있다. 부산에선 가장 잘 알려진 산복도로는 부산 원도심인 동구 범일동에서 수정동, 초량동을 거쳐 중구 영주동 일대를 거치는 망양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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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유치환우체통 전망대에서 보이는 부산 시가지와 부산항대교 전경. 유치환우체통에서는 1년 후 배달되는 엽서를 써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
이곳에 오르면 부산 동구에서 생을 마감한 청마 유치환 시인을 기린 유치환우체통 전망대, 스카이웨이 전망대 등을 지나게 된다. 꼭 전망대가 아니더라도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길이다 보니 차를 타고 가며 바다가 보이는 멋진 풍경에 감탄사를 내뱉게 된다. 하지만 예전 우리 부모들은 이곳을 매일 걸어 올랐다. 잘 닦인 도로나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초량동을 지나면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168계단’을 만난다. 산복도로에서 부산항과 부산역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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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량동에 있는 168계단. 산복도로에서 부산항을 가기 위한 가장 빠른 길이다. 남자들은 부둣일을 하기 위해 이 계단을 전 속력으로 뛰어 내려갔다. 여자들은 계단 아래 우물에서 식수를 받기 위해 매일 물항아리를 짊어지고 수도 없이 오르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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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묘비를 이용해 담장을 쌓은 모습. |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비석마을
산복도로로 대표되는 부산의 옛 흔적을 가장 뚜렷이 간직하고 있는 곳은 서구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이다. 비석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이곳은 묘지였던 곳이다. 일제 때 부산에 거주한 일본인들이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화장한 후 유골을 묻은 곳이었다. 말 그대로 화강암 납골묘로 된 공동묘지였다. 광복 후 일본인은 떠났지만 묘는 그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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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미동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납골묘 위에 집을 짓고 삶의 터전을 마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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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아미동 비석문화마을의 이층집. 일층 보다 조금이라도 넓은 공간을 사용하기 위해 폭을 넓혀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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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바다가 펼쳐진 절벽 위의 동네 흰여울문화마을. 강한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는 곳이어서 대풍(大風)포로 불렸다. |
영도구 흰여울문화마을은 절벽 위의 동네다.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봉래산 기슭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얀 거품을 내 흰여울마을이 됐다. 난리통에 늦게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이 자리를 잡은 곳이다. 부산항에서 거리가 멀지만 걸어서 영도대교를 건너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기에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바로 앞에 바다가 펼쳐진 절벽 위의 집을 생각하면 멋진 풍경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태풍이 지나는 길이자, 앞에 막힌 곳이 없어 강한 바닷바람을 그대로 맞는 곳이었다.


부산=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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