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직 고등법원 판사가 한국 법조계의 고질병인 ‘전관예우’의 폐해를 지적해 눈길을 끈다. 이인석(48·사법연수원 27기) 서울고법 판사는 27일 법률신문에 기고한 ‘퇴직 판사와 전관예우’라는 글에서 전관예우의 문제점을 꼬집고, 그 대안으로 미국과 같은 ‘원로판사’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이 판사에 따르면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한국과 같은 전관예우 논란을 찾아볼 수 없다. 미국을 예로 들면 2006년 은퇴한 미국 최초의 여성 연방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는 대법관을 사임한 후에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원로판사(Senior Judge)’로 일하며 다양한 활동으로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 2009년 은퇴한 데이비드 수터 전 연방대법관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고향에서 하급심 판사로 일한다.
이 판사는 “미국은 판사에게 명예로운 은퇴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1919년 원로판사 제도를 만들었다”며 “원로판사는 판사의 정원으로 계산하지 않아 법원은 그만큼 신규 판사를 충원할 수 있으므로 법원의 업무 과중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소개했다.
그에 의하면 미국은 판사가 현역에서 은퇴할 때 원로판사의 길을 선택하는 경우 재판연구원(로클럭) 등 보좌진과 사무실을 유지하면서 4분의 1 정도로 사건 부담을 줄여 계속 판사로 근무할 수 있다. 미국의 연방법원 사건 중 원로판사에 의해 처리되는 사건 비율은 연평균 15%에 이른다. 미국도 경제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사임하는 판사가 있지만, 대부분 원로판사의 길을 택한다고 한다.
이 판사는 “판사들에게 전관이 되는 길 이외에 별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은퇴의 길을 열어주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퇴직 법관이 전관 변호사가 되는 대신 원로법관으로 남는다면 국민에게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확신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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