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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문학기행] 사라진 골목길이 그리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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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9-01 20:33:44 수정 : 2016-09-01 20:3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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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키워준 노스탤지어의 고향 / 웃음소리·곰살궂은 인정은 어디로
최근 카페나 음식점이 좀 ‘뜬다’ 하면 골목 전체의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오히려 이 구역 밖으로 내몰리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커다란 신식건물이 속속 들어서면서 사라지는 것은 단지 정겨운 옛 건물과 오밀조밀한 상점만이 아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아파트 숲으로 인해 점점 사라져가는 ‘골목길의 정서’를 빼앗아간다. 땅따먹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말뚝박기, 공기놀이를 하는 아이를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겼던 가회동 골목길에선 이제 뛰노는 아이를 찾아보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다.

내게 ‘골목길’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는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다. 단발머리 중학생 시절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슬픔과 기쁨이 묘하게 뒤얽힌 벅찬 떨림을 맛봤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너와 헤어져 돌아오는/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누군가와 헤어져 돌아오는 골목길의 뼈아픈 외로움마저도,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골목길의 정서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사랑도 가난도 외로움도 모르던 시절, 나는 ‘가난한 사랑 노래’를 통해 그 모든 아픔을 한꺼번에 이해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 시를 통해 한꺼번에 깨달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느끼게 된 모든 기쁨과 행복을 한꺼번에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하는 일임을. 화려한 고층아파트나 대로변이 아닌 후미진 골목길에서 느끼는 삶의 추위마저도, 이제는 가슴 시린 노스탤지어(향수)의 대상이 돼 버렸다.


정여울 작가
최근엔 수필가 고임순의 ‘골목길’을 통해 잃어버린 골목길의 노스탤지어를 되새겨봤다. 그는 “흙먼지 부옇게 일던 신작로, 돌부리에 넘어져 무릎을 깨고 울던 골목길, 납작한 초가지붕이 이어진 산동네 후미진 언덕길”이 자신을 키워준 정겨운 요람임을 기억한다. 구불거려서 끝이 보이지 않아 더욱 궁금한 골목길, 뚜렷한 목표를 향하기보다는 두리번두리번 해찰하면서 다녀야 제 맛인 골목길. 그 골목길에서는 ‘저 길 끝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항상 나를 부르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었다. “강 건너 학교가 징검다리로 나를 부르는가 하면, 산동네 숙이네 사립문이 오솔길로 나를 불렀고, 가로수 이어진 신작로가 도시로 나를 불렀다.”

한 동네에 사는 인연으로 만나 풋사랑을 키워가던 연인과 결혼에 골인하게 해준 것도 골목길의 힘이었으며, “아이들이 공을 차며 뛰놀고 시어머니께서 동네 어르신들과 담 그늘에서 담소하시던 길,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희미한 가로등불 아래서 하루살이를 쫓으며 기다리던” 그곳도 골목길이었다. ‘하룻밤 주무시고 가시라’는 딸의 부탁을 한사코 거절하고 “또 오마”하시며 지팡이를 짚고 휘청휘청 사라지신 부모님의 마지막 뒷모습도 골목길의 한 서린 추억이었으니. 도시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삭막한 빌딩숲 속에서도 사람들 웃음소리와 이웃의 곰살궂은 정이 아직은 남아있던, 고향을 잃은 모든 현대인의 마음속 오아시스가 아닐까.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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