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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폭설이 내렸다. 대한(大寒)이라는 절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어제는 온 나라가 눈세계로 변했다. 이름하여 설국(雪國). 일본에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안겨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동명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소설을 읽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편이다. 야스나리의 눈은 먼 고장의 쓸쓸한 배경으로 다가온다. 눈의 이미지는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문학작품에 변주돼 왔다.

1982년 최승호 시인에게 ‘오늘의 작가상’을 안겨준 ‘대설주의보’는 눈의 이미지에 기댄 대표적인 시편 중 하나다. 이 시편은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마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로 시작하여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으로 끝을 맺는다. 신군부 시절 암울하던 시대 배경 속에서 눈보라조차 ‘백색 계엄령’으로 다가오는, 마음이 추운 시절의 삽화가 그대로 반영된 셈이다.

문정희 시인은 폭설을 낭만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영접한다. 그녀는 ‘한계령을 위한 연가’에서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이라고 읊는다. 그리하여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이라고 바라면서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라고 노래한다.

폭설이 이런 낭만보다 현실에서는 재앙인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해 이맘때쯤 미국 동부지역에는 최악의 눈폭풍이 불어닥쳐 11개주에서 41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원활한 제설작업을 위해 자동차나 보행자가 거리에 나오면 벌금까지 부과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오늘 이 땅에 내린 눈으로 시민들이 겪는 불편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었을 때 창호지가 유난히 환해 눈이 내린 걸 직감하던 유년기 들녘 마을이 생각난다. 마당에 나와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에 첫발을 내디디며 발자국으로 꽃무늬를 만들던 은백의 순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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