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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여가 있는 삶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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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2-01 00:12:04 수정 : 2017-02-01 0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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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가 미덕일까… 러셀의 ‘게으름 찬양’ 되새길 때 나흘간의 설 연휴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거나 여행을 다녀왔을 것이다. 누군가는 극장가를 찾는가 하면 집에서 TV를 켜놓고 온종일 설특집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지냈을 법하다. 현대 도시인의 여가 활동은 대체로 수동적이다. 영화와 공연 또는 스포츠 경기 관람에 그친다. 이는 그들의 적극적인 에너지가 모조리 ‘근로’에 흡수되어 버린 탓이다.

과거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은 소수였고 일하는 계층은 다수였다. 원시공동체 시절, 전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요구했다. 이들은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자들을 부양하는 데 쓰인다 하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다. 이 방법을 쓰자 강제력을 동원할 일이 적어지고 지배에 드는 비용 또한 줄어들었다. 유한계층은 자기들만의 공감대를 형성하며 특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들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수천년에 걸쳐 노동의 존엄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일을 생계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생각할 뿐이다. 노동자들이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일이 아니라 여가에서 얻는 것이다.

김신성 문화부 차장
여가는 ‘문명’에 공헌해 왔다. 예술을 발전시키고 과학적 발견을 이뤘다. 책을 쓰고, 철학을 탄생시켰으며 보다 세련된 사회적 관계를 형성했다. 여가가 없었더라면 인류는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바람직하다’는 관념을 경계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라는 편견을 낳았다. 모순이다. 물품 생산의 가치는 그 물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의해 획득된 이익에서 나온다.

노동이 우리 생존에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인간 생활의 목적이라고까지 강요해선 안 된다. 셰익스피어보다 인부 한 사람이 더 낫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집권자들은 ‘근로’를 권장해왔다. 소박한 생활을 예찬했고, ‘노동’에는 특별한 고귀함이 있다고 설득해 왔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그가 생산한 것에 비례해 임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근면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미덕에 비례해 임금을 받게 되었다.

여가를 여가답게 누리는 세상에서는 만성피로와 스트레스, 소화불량과 신경쇠약 대신 행복과 환희가 충만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필요한 일만 함으로써 기력을 소모하는 일 없이 뭔가 유용한 것을 추구할 것이다. 적어도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한 오락거리들만 찾진 않을 것이다.

현대 산업 기술의 발전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겐 ‘금수저’를, 다수의 사람들에겐 ‘흙수저’를 쥐어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도 기계가 없던 시절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열심히 일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조장하고 있다.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에 의해 엄청난 해악이 발생한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지금의 우리 사회에 적용해 볼 만하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란 글에서 그가 말한 ‘게으름’은 목표달성주의에 떠밀려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정작 잊고 사는, 인간성 회복에 꼭 필요한 ‘여유’를 뜻한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지금까지 쉬지 않고 뛰어왔으니, 멈춰서는 안 된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위해 헉헉대며 삶을 달려가고 있는지 뒤돌아보고 성찰할 때다. 그런 다음 뛰어도 늦지 않기 때문이다.

김신성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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