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왕조 희생양 된 김정남 최후 씁쓸
조선사회에서 살아 있는 왕의 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왕인 태종에 의해 왕세자의 자리를 박탈당하고 동생인 충녕대군(후의 세종)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한 양녕대군(1394~1462)은 한양을 떠나 이천 등지에서 풍류로 생을 보냈다. 살아 있는 형의 존재는 세종에게도 정치적 부담이었고, 기행을 일삼는 양녕대군에 대한 처벌 논의도 있었지만, 세종은 그때마다 형을 변호했다. 1년에 한 번은 한양에 불러 음식을 대접하면서 형제의 우애를 보이기도 했다. 살아 있는 형을 제대로 대접한 모습은 후대의 사례와 비교할 때 세종의 훌륭한 인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생의 배려 속에 양녕은 1450년 54세로 세종이 승하한 이후에도 12년을 더 살았고 당시로는 장수인 69세로 생을 마감했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1469년 예종이 승하한 후,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4세로 너무 어려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예종의 형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1454~1488)은 왕위 계승 1순위로 떠올랐다. 그러나 왕위는 의외로 동생인 잘산군(후의 성종)이 계승했다. 잘산군의 장인 한명회가 대비인 정희왕후를 움직인 것이었다. 왕의 형으로 사는 것에 부감을 느낀 월산대군은 정치 현실을 떠나 은둔해 살다가 35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왕의 형으로 정치에 휘말려 희생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은 임해군이다. 임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광해군의 형이었으나, 왕자 시절부터 성격이 포악하고 후계자의 자질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동생이 왕이 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1609년, 본인도 적통이 아니어서 왕통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광해군에 의해 사병을 길러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진도를 거쳐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된 후 살해됐다. 처음에는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인조반정 후 기획된 살인임이 밝혀졌다. 아버지에 의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고종에게도 동복형 이재면(1845~1912)이 있었다. 이재면은 흥선대원군의 장남으로, 1863년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기회가 왔지만 19세의 나이가 부담이 됐다. 섭정을 계획한 흥선대원군에게는 12세의 아들 재황(후의 고종)이 왕이 되는 것이 편했던 것이다. 고종에게는 이재선이라는 이복형도 있었는데, 고종과 흥선대원군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아버지를 지지하다가 1881년 역모 혐의로 처형을 당했다.
조선왕조에서도 왕의 형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왕조처럼 3대의 권력 세습이 행해져서일까. 죽음조차 왕조의 모습을 그대로 빼닮은 김정남의 최후에 대해서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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