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뿐이랴. 돌아보면 인생의 마디마디에 상처 자국 하나 없는 이 있을까. 너무 많은 것들을 껴안고 노심초사하지는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지금은 비록 아프더라도 과감하게 쳐내야 할 것은 없는지, 생의 반환점을 돈 지 오래인 길에서 생각했다. 아깝더라도 과감히 잘라내야 할 건 잘라서 불 속에 던져야 한다. 본분에서 벗어나 제 갈 길을 잃어버리면 요한복음의 정언처럼 타의에 의해 잘려서 던져져 말라버릴지 모른다. 사람들은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고 했다. 성경의 포도나무 비유는 ‘내 안에 머무르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일 테지만, 길지 않은 생에서 쓸데없다고 무작정 쳐내는 것만 능사가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시인의 어머니는 뜰에 있는 나무들을 결코 가지치기 하지 않았다. 다 제 알아서 할 일이라며 스스로 가지치기를 기다렸다. 신기하게도 나무는 거센 비바람에 제 가지를 스스로 부러뜨리기도 하고 너무 무리다 싶으면 해거리를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기르시며/ 혹여 빗나간 길에도 결코 가위를 대지 않으시고/ 끝내 사랑의 눈길로 지켜보신 것이지요/ 문득 우리의 해묵은 둥치를 보면/ 어머니의 손길이 반질반질 빛이 납니다/ 더러는 부러지고 옹이진 상처마다/ 오히려 강단 있게 보입니다”(김영천, ‘가지치기’)
적당히 손을 봐줘야 더 옹골차게 자랄 거라는 상식을 뒤엎은 경우다. 제가 알아서 떨쳐낼 건 버리고, 부러져 상처를 입은 자리에 스스로 옹이도 만들어내고, 정 힘들면 쉬었다 가는 자연의 법칙에 손을 들어준 셈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이대로 기다릴 건가, 과감히 버리고 갈 텐가.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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