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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아버지의 명예퇴직과 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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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16 22:17:03 수정 : 2017-04-16 22: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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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 이런 걸 퍽 갖고 싶었는데….”

아버지께선 갓 태어난 아기를 다루듯 앞에 놓인 시계를 어루만지셨다. 새 시계가 맘에 드셨는지 당신께서 알고 계신 유명 시계 상표를 하나씩 나열하시더니 “그래도 딸이 사준 게 제일 예쁘다”고 하셨다. 은장과 금장이 어우러진 그 시계는 보편적이고 무난해 거의 모든 중년 남성에게 어울린다고 점원은 내게 설명했다. 평범한 아버지의 ‘첫 시계’.


김민순 사회부 기자
아버지의 시계에는 늘 다른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국무총리 황교안’이었다. 면장 시절 받은 상에 딸려온 기념품이었다. 시계는 때로 바뀌기도 했지만 ‘충남도청’ 같은 기관명이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린 나는 모든 아버지의 시계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지난 세대의 모든 아버지가 그랬듯 우리 아버지 역시 새벽 일찍 집을 나서 밤늦게 돌아오셨다.

바쁘신 와중에도 아버지께서 잊지 않는 것이 있다면 시계를 차는 일이었다. 당신께선 매일 아침 실밥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시계를 정성스럽게 손목에 맨 뒤 잠시 시곗바늘을 가만히 지켜보셨다. 그리고선 곧 ‘다녀올게’ 하며 현관을 나서셨다. 연이어 승진에서 밀리셨을 때에도, 민원인들로부터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라는 말을 들으셨을 때에도 그랬을 것이다.

아버지의 시곗줄이 낡고 해지고 바래는 동안 나는 무럭무럭 자라 ‘시간이 없다’는 말이 습관이 된 직장인이 됐다. 아버지의 시간을 먹고 자란 나도 어느덧 “회사 때려치우고 싶다”는 불평이 버릇처럼 입에 붙고 잦은 야근과 술자리에 이골이 났다. 녹초가 된 몸으로 퇴근하는 날에는 꼭 아버지가 생각났다. 당신께선 36년을 어떻게 견디셨을까. 어두운 퇴근길에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런 아버지께서 최근 정년을 바로 눈앞에 두고 명예퇴직을 하셨을 때 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속으로는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늘 일선에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시던 아버지였다. “괜찮다. 속이 시원하다”던 아버지는 어느날 엄마와 함께 동네 사진관에 가셨다. 한 번은 나란히 앉아, 나머지 두 번은 번갈아 독사진을 찍으셨다. 그 사진을 이 다음에 영정 사진으로 쓰고 싶다고 하셨다. “아니, 인생은 60세부터라는데 무슨 소리야”라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아버지에게 명예퇴직은 그만큼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생직장’이란 말이 사라지고 ‘노인빈곤’, ‘청년실업’ 같은 말이 더 익숙한 시대가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인의 평균 퇴직 연령은 52.5세, 이 가운데 정년퇴직자는 7.6%에 불과하다. 직장인 대다수는 어떤 이유에서든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정든 일터를 떠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이 바쳐 온 세월과 열정을 어떻게 52.5처럼 딱 떨어지는 숫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시계를 고른 내게 점원은 손편지를 쓰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뻣뻣한 딸인 내가 새삼 편지를 쓰는 게 쑥스럽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퇴직을 특별하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서였다. 해진 시계를 푼 뒤에도 새로운 시간은 시작될 테니까.

김민순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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