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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조선의용대의 산실 다궁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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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20 21:46:47 수정 : 2017-04-20 21:4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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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가들은 1937년 7월 시작된 중일전쟁을 독립을 쟁취할 절호의 기회로 인식했다. 독자적으로 활동해 온 각 단체들은 연합전선을 펴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우익 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좌익 진영의 조선민족전선연맹(민족전선)이 결성됐다. 

이 가운데 후베이성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민족전선은 무장부대의 조직과 대일항전의 참여를 목표로 했다. 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국중앙군사학교 싱쯔(星子)분교 졸업생들이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부대를 조직하는 사업에 집중했다. 

민족전선은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했다. 이 제안은 모든 항일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무장부대를 규모상 ‘군(軍)’보다는 ‘대(隊)’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부대를 군사위 정치부 담당 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당시 중국 국공합작 육해공군 총사령관인 장제스(蔣介石)의 재가를 얻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과 중국 측 대표들이 모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했다. 지도위는 군의 명칭·조직 인선·편제·활동경비 등을 결정했다. 지도위 위원은 중국 군사위 정치부 측 4명과 민족전선 산하 단체 대표 4명이 선정됐다. 민족전선 4인은 김원봉·김성숙·김학무·유자명이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가 창립대회를 개최한 옛 다궁중학교터.
독립기념관 제공
양국의 협의를 통해 민족전선은 1938년 10월 10일 한커우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신문, 대일본군 반전선전, 대중국민 항전선전 활동 등을 수행했다. 

조선의용대 창설식에는 중국 측 주요 인사들도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용대 결성에 직접 관여한 정치부장 천청(陳誠)과 비서장 허중한(賀衷寒)은 물론이고 조선의용대 창설에 공헌한 일본인으로 반전운동가이자 공산당원인 아오야마 가즈오(靑山和夫) 등도 참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周恩來)와 정치부 제3청장 궈모뤄(郭沫若)가 참석해 연설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의용대가 성립되자 1938년 10월 13일 한커우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축하행사가 거행됐다. 다음 날인 10월 14일 ‘신화일보’에는 조선의용대 성립 소식과 김원봉의 연설 등이 소개됐다.

조선의용대가 창립대회를 개최한 곳은 후베이성 우한시 우창구 쯔양로(紫陽路)에 있던 다궁중학교로 알려졌다. 지금은 다궁중학교가 폐교되고 이 자리에 후베이성총공회(노동조합연맹)가 자리 잡고 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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