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의 주도로 간행된 서적을 관판본(官板本)이라고 부르는데 간행을 담당했던 중앙관청은 교서관(校書館)이 대표적이다. 교서관 외에도 역학서 편찬을 담당한 사역원, 세자 교육기관인 시강원, 의서 간행을 맡은 내의원과 관상감 등 각 관청에서 성격에 맞는 책을 만들었다.
필요에 따라 찬수청, 찬집청, 교정청 등과 같은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서적을 편찬하기도 하였으며, 지방에서는 금영(충청도), 기영(평안도), 영영(경상도), 완영(전라도), 해영(황해도) 등과 같은 감영에서도 관판 책 생산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관판본에 비해 비중이 덜하긴 하지만 민간에서도 사찰, 서원, 문중, 그리고 개인이 필요에 따라 서적을 간행하였고, 19세기에 들어서는 이윤을 목적으로 간행되는 방각본(坊刻本)이 성행하기도 하였다.
우리 전통의 인쇄문화를 연구하면서 인쇄된 책의 형태와 내용에 치중하다 보면 그 책 자체를 인쇄한 장인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된다. 더욱이 관판본에는 그 책을 만든 인쇄 장인의 모습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활자 인쇄의 경우는 더욱 그런데, 인쇄된 책에 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고 그나마 극히 일부 남아 있는 발문의 기록에서 간행기간과 발행부수 정도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활자의 주조를 관장했던 주자소의 모습. 미래엔아이세움 제공 |
경국대전과 법전 등에서 책 간행에 참여한 장인의 인원 수와 명칭 등을 정하고 있지만 매우 제한적이다. 그나마 장인의 역할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조선 전기의 수필집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책의 인쇄 과정과 함께 언급한 것이 있으며, 국가 행사의 공식적인 기록물인 의궤에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용재총화의 내용을 보면 전통방식 인쇄에서 분업화된 인쇄 장인의 역할을 간략히 서술했다.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자를 각자장(刻字匠), 활자를 주조해 내는 자를 주장(鑄匠), 여러 활자를 나누어 장궤(藏櫃)에 저장하고 그것을 관리하는 자를 수장(守藏), 원고인 서초(書草)를 불러서 맞추는 자를 창준(唱准)이라 했는데 모두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맡았다.
수장이 활자를 서초 위에 나열하면 이를 인판에 옮기고 나서 활자를 배열하고 대나무, 나무, 파지로 여백을 채워서 견고하게 고정하여 움직이지 않도록 하는 사람을 균자장(均字匠), 글자 심은 판을 인쇄하는 사람을 인출장(印出匠)이라 하고, 인쇄과정을 감독하는 감인관(監印官)은 교서관원(校書館員)이 맡았다. 감교관(監校官)은 따로 문신(文臣)을 명하여 맡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장인의 유형보다도 훨씬 많은 유형의 장인이 책의 간행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궤에 기록된 관판본 인쇄 장인
인쇄 장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의궤다. 의궤는 주로 국왕이 수행하는 국정 가운데 경비가 많이 소요되는 국가 행사를 대상으로 제작되었으며, 행사의 내역 일체를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 규장각에 남은 2000여건의 자료 중에 교서관 등의 관청에서 책을 간행하고 그 내역을 기록한 인쇄 관련 내용은 매우 드물게 남아 있다. 그 기록에는 인쇄 장인의 유형과 용구 등 비교적 상세히 담겨 있는데 금속활자, 목활자, 목판 등 책의 인쇄의 방법에 따라 인쇄 장인의 유형이 정해졌다. 목판인쇄의 경우는 활자 인쇄 장인인 균자장이 없고 인출장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으며, 목활자인쇄의 경우 각자장(刻字匠), 조자장(造字匠)이 나타난다.
‘국조보감감인청의궤’의 경우는 ‘국조보감’을 활자로 먼저 간행하고 이를 다시 목판으로 새겨 간행하였기 때문에 활자인쇄 장인과 목판인쇄 장인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 의궤에는 책의 인쇄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장인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장인도 확인할 수 있다. 실록의 경우 실록을 보관하는 궤 제작담당에 나무를 다루는 목수나 열쇠 장인, 끈짜기 장인, 칠하기 장인 등이 적혀 있으며 해당 책 간행에 참여한 장인의 운용이나 각 공정별로 소용되는 물품이 기록되었다.
중종 때 만든 법령집인 ‘대전후속록’의 교서관 인쇄장인 벌칙 규정.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장인의 운용에 관한 내용은 해당 의궤의 사목(事目)으로 정해져 있다. 대부분 상설아문에 소속된 경공장이나 외공장이 해당 아문으로부터 차출되는 것이었다.
책의 인쇄와 관련된 장인의 경우도 이러한 일반적 운영방식에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주로 교서관에 소속된 경공장이 차출되었고, 간행사업의 규모에 따라 사장(私匠) 및 각 지방의 외공장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이러한 방식은 유지되었으나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각 관청마다 장인이 소속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으며, 인쇄 관련 장인 중에 교서관 소속 인원이 대폭 줄어들기도 했다.
인쇄 장인의 업무 실수에 대한 벌칙 규정도 법률로 정해져 있었는데, 중종 때 법령인 ‘대전후속록’에서는 감인관, 감교관, 창준, 수장, 균자장에게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씩 더하여 오자 수에 따라 벌하고, 인출장은 글자의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것이 있을 때 한 글자당 같은 벌을 내렸다.
관원(官員)은 다섯 글자 이상이 틀렸을 때 파직시키고, 창준(唱準) 이하 장인은 때린 뒤에 50일의 근무일수를 깎았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칠 정도로 무거운 벌칙이지만, 15∼16세기 높은 수준을 유지했던 조선 관판본 인쇄기술이 이렇게 살벌한 벌칙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어 편하지만은 않다.
실제로 선조 7년(1573) 2월에 인쇄한 ‘황화집’과 ‘내훈’의 자획이 희미하고 바르지 않아 담당관에게 책임을 물어 당시 교서관 책임자가 그 다음날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같은 해 3월17일 형조에서는 ‘대전후속록’의 규정을 언급하면서 그대로 논죄하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대해 국왕은 흐린 글자의 원인이 먹에 있음을 언급하고 참작해서 조율하게 하였다.
인쇄 장인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무거운 것에 대해 중종 이후 명종과 선조를 거치면서 규정 그대로 적용하지 않고 실제로는 완화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대전회통’에 이르러서는 대폭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
한국의 기록문화 역사는 그 유래가 깊다. 특히 인쇄한 서적에 대해서는 인쇄 기술의 연원과 함께 세계적인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2017년 현재 13건인데, 이 중 6건이 전통방식으로 제작된 인쇄물이거나 인쇄 문화와 깊은 관련을 지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쇄물을 만든 사람에 대해서 묻는다면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 많지 않다.
고려에 이어서 활자 인쇄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시대 인쇄 문화에 대해 그동안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수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정작 전통 인쇄를 완성하는 주체 중의 하나인 기술자, 즉 인쇄 장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록의 나라’라고 하지만 그들에 대해 다루고 있는 문헌도 거의 없고 그들의 활약과 업무에 대하여 수록하고 있는 자료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기록도 대부분 단순한 사실을 나열하고 그 체제나 운영방식은 몇 가지 제한된 기록을 통하여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로버트 단턴의 유명한 저술 ‘고양이 대학살’에서는 한 인쇄공이 남긴 일기 형식의 기록을 통해 역사 속 인쇄공의 생활과 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18세기 프랑스 부르주아와 인쇄공으로 이루어진 피고용인 간의 갈등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전통 인쇄 장인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려면 그들의 삶이 담긴 기록을 지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의궤에 남겨진 인쇄 장인의 기록은 제대로 된 일기나 기록이 없는 가운데, 부분적이어도 그들의 역할을 조명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는 곧 한국 전통 지식 문화의 빈자리를 채우는 작업이기도 하다.
옥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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