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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무희’ 최승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평론·수필서 단편소설까지… 빼어난 글 솜씨 자랑

입력 : 2017-04-22 03:00:00 수정 : 2017-04-21 20:5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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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소설 ‘전선의 요화’를 쓰다 최승희는 무용가다. 당연한 얘기이고, 다 아는 사실이다. 무용가로만 알고 있는 최승희가 소설도 썼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전선(戰線)의 요화(妖花)’라는 제목의 단편소설이다. 1938년 1월 1일자로 발행한 월간지 야담(野談)에 실렸다.

소설 말미에 ‘기자’ 명의로 “이것은 최근 도구(渡歐)하는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희 최승희 여사가 도구 전 특히 집필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이례적으로 덧붙이고 있다. 이 부기(附記)는 이 소설의 작가가 최승희라는 점을 밝혀주는 분명한 증거이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승희가 쓴 소설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 작품을 예로 들어 최승희가 소설을 썼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했을 때 대부분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작품의 내용과 수준은 여기서 내가 평가할 일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바는 최승희가 과연 소설을 쓰고 발표할 만큼 문필력이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최승희가 1930년대 중반 일본에서 광고 모델로 활동할 때 찍은 톰보연필 광고. 최승희는 무용가로서뿐 아니라 작가로서 소설을 출간하는 등 다양한 글을 남겼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최승희의 문필력은 요즘 기준으로 보아도 수준급이다. 그 바탕은 소녀 시절에 많은 문학작품을 읽은 덕분이었다. 최승희가 당시 ‘진보적 인텔리’였다고 말한 오빠 최승일의 영향이었다.

1937년 7월에 펴낸 ‘최승희 자서전’에 실린 ‘나의 결심과 나의 성격’에서 이와 관련해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오빠는 나에게 사물에 대한 정당한 관찰과 이해에 길을 열어주며 가르쳐 주었다. 나는 오빠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시와 소설을 읽었다.”

최승희는 순수 문학작품보다는 진보적, 정치적 성향의 경향문학을 더 좋아했다. 아마 카프(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의 핵심 회원으로 활동한 오빠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나의 결심과 나의 성격’에서 최승희는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1930년대 최승희가 일본 가마쿠라 해변에서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는 모습이다.
“꿀처럼 달고, 꿈처럼 헛된 시와 소설은, 나의 마음에 아무러한 재미도 없었다. 말하자면 현실 속으로 파고들어가서 생활의식이 풍부한 작품을 애독하였다. 석천탁목(石川啄木)의 시와 노래를 한없이 애독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리웁기 한이 없다. 석천탁목 선생의 시와 노래는 피가 끓을 만큼 나에게 실감을 주었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는 당시 일본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가인(歌人)·시인·평론가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다. ‘최승희 자서전’을 읽어보면 최승희가 일찍부터 글쓰기에 꽤 능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자서전에서 최승희가 직접 쓴 글은 1부에 실려 있는 11편이다. 목차를 일별해 보면 ‘학교를 맟을(마칠) 때까지’ ‘나와 서모(庶母)’ ‘나의 결심과 나의 성격’ ‘눈물의 이별’ ‘고향을 떠나 새로운 연구에’ ‘독립무용연구소 개설’ ‘결혼 전후’ ‘또다시 동경에’ ‘출발전야’ ‘형제에게 보내는 글’ ‘고뇌의 표현’ 등이다.

이 책에 자서전이란 제목이 붙어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자전적 에세이집으로 부르는 게 더 옳아 보인다. 이 책이 나온 1937년은 최승희가 불과 26살 때였으므로 자서전을 내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기도 했다. 

1936년 10월 일본어판인 최승희의 ‘나의 자서전’ 표지. 한국어판 자서전과는 내용이 다른 별개의 책이다.
‘최승희 자서전’이 한국어판이라면 최승희의 일본어판 ‘나의 자서전’은 별개의 책이다. ‘나의 자서전’은 ‘최승희 자서전’보다 9개월 앞선 1936년 10월에 일본 도쿄에서 출판됐다. 최승희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15살 때부터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했기에 일본어 구사에 불편함이 없었다.

‘나의 자서전’은 목차만 비교해 보아도 ‘최승희 자서전’과는 완연히 다르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무용의 길 떠나다’ ‘이시이 바쿠 선생’ ‘고향으로’ ‘도쿄를 떠나다’ ‘독립’ ‘결혼’ ‘고난의 길’ ‘사랑하는 아이’ ‘다시 도쿄로’ ‘데뷔하기까지’ ‘데뷔’ ‘독립’ ‘나의 무용 방향에 대하여’ 등이 ‘나의 자서전’의 목차다.

최승희의 글쓰기는 다방면에 걸쳐 있다. 자신의 무용 이론을 피력한 평론도 적지 않다. 최근에 확인한 최승희의 첫 무용평론은 1932년에 발표한 ‘조선 민중과 무용’이다. 그해 8월호 개벽지에 실려 있다. 최승희 연보(年譜) 어디에도 언급이 안 된 글이다. 이 글에서 최승희는 “무용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이란 인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면서 최승희는 무용을 “귀족, 승려와 같은 일부의 수중으로부터 대중의 수중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최승희가 1930~1940년대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흥미로운 글도 많다. 흔히 잡문(雜文)으로 통칭되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글을 말한다. 최승희가 직접 쓴 이런 유의 글이 적지 않아 ‘인간 최승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최승희가 쓴 글에는 무용가답게 역시 무용 얘기가 많은 편이다.

최승희가 일본에서 귀국한 이듬해인 1930년 삼천리 2월호에 ‘일가일언(一家一言)’의 필자로 등장한다. 이 글에서 최승희는 당시 조선 사람들의 무용에 대한 몰이해를 지적하면서 자신의 신무용론을 펼친다. 꼭 1년 뒤 1931년 같은 잡지 2월호 기고문 ‘공연무대에 서서는’에서는 “새로운 의식 아래에서 무용예술운동”을 주창하고 있다. 

최승희가 1938년 1월 월간지 야담을 통해 발표한 단편소설 ‘전선의 요화’에 들어 있는 삽화.
최승희는 무용가로서 다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글도 눈에 띈다. 1929년 6월에 발행된 잡지 별건곤의 ‘나의 청춘 나의 보물’이란 제하의 기사에서다. 최승희는 이 글에서 “다리는 무용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보물”이라고 단언한다.

최승희가 생각하는 ‘다리의 미(美)’는 “첫째로 건강이고 자연스럽게 꼿꼿하고 날씬하게 발달한 것”이다. 최승희는 자신의 다리가 이런 기준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는지 “남달리 큰 체구와 건강을 양친에게 받았지만 다리의 미로는 과연 자신이 없다”고 겸양의 태도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보물 1호로 다리를 들고 있다.

당시 만국부인(萬國婦人)이란 잡지가 있었다. 당대 인기 잡지 삼천리의 자매지 성격의 여성지였다. 1932년 10월호 창간호만 펴내고 폐간됐다. 그 잡지에 ‘신여성의 신생활론 No.1’이라는 기획기사도 실렸다. 최승희가 쓴 것은 ‘신여성이여 무용하라’는 제목의 글이다. 이 글에서 최승희는 대부분의 무용 관객이 ‘인텔리나 소부르주아 계층’인 당시 현실을 지적하면서 무용의 대중화를 적극 주장하고 있다. 이를 위해 “각 여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용을 성의 있게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피력한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최승희는 삼천리 1935년 7월호에 꽤 긴 신혼기를 쓰기도 했다. ‘신록의 신혼여행’이라는 기획 기사의 일환이었다. 최승희가 쓴 신혼기는 ‘꿈을 안고 동경으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주제는 신혼기이지만 이 글에서도 무용과 관련된 이야기로 내용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신혼 시절에도 최승희는 무용을 향한 “열(熱)과 의(意)가 너무나 뜨거웠다”는 것이다. “나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스러워야 할 신혼기를 나는 조선의 현실과 용감히 싸워 나가며 다만 무대의 앞뒤에서 낮과 밤을 같이하여 왔었다”면서 결혼을 했어도 무용에 대한 열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토로하고 있다.

당시 필자로는 소설가 백신애·장덕조, 여의사이자 작가 이광수의 부인이었던 허영숙 등 당대 여류 명사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다. 이를 보면 최승희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필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승희는 1946년 7월 월북한 뒤에 오히려 본격적인 글쓰기에 나선다. 해방 전과 비교해 북한에서는 상대적으로 무거운 글을 썼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사도성의 이야기’를 비롯해 최승희 작품으로 알려진 무용극 대본을 직접 집필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얘기이다. 북한에서 발표한 무용 연구 논문이나 평론도 다수이다.

이 중 최승희의 대표적인 저작물이 중국 옌볜대 이애순 교수 편저로 2002년에 국내에서 출판된 ‘최승희 무용예술문집’에 실려 있다. ‘조선무용동작과 그 기법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징’을 포함한 연구 논문만 10편에 이른다. 이 중 1951년 2월 중국 인민일보에 발표한 ‘중국 무용예술의 장래’는 특기할 만하다. 이 책 안에는 ‘고상하고 절묘한 민족예술’ 등 창작담이나 감상문도 6편이 들어 있어 최승희 글쓰기 재주를 엿볼 수 있다.

최승희는 1958년에 ‘조선민족무용기본’, 1964년에 ‘조선아동무용기본’을 각각 펴냈다. 최승희가 남긴 이런 저서는 무용 실력과 함께 글 솜씨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승희가 남긴 다양한 글들을 두고 남이 쓰거나 고쳐주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특히 당대 문사(文士)였던 최승희의 남편 안막이나 오빠 최승일을 흔히 떠올린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최승희의 뛰어난 문필력을 고려할 때 이는 부질없는 의심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길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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