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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괴물 속 들여다본 17년… 괴물 안 되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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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4-30 10:00:00 수정 : 2017-04-28 21: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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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 앞둔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찰청 범죄분석팀장 “괴물과 싸우는 자는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오랜 시간 심연을 들여다보는 만큼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볼 것이니….”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선악을 넘어서’에서 말한 이 잠언을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 요원)들은 금언으로 삼는다. 괴물과 같은 범죄자의 마음속으로 걸어들어가 그들의 어두운 충동을 해부하는 것만큼이나 매혹적이면서도 긴장되는 일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내 1호 프로파일러로 권일용(53) 경찰청 범죄분석팀장이 최근 명예퇴직을 신청했다는 소식에 경찰은 물론이고 학계, 언론, 심지어 프로파일러를 지망하는 청소년들까지 아쉬워했다. 그는 프로파일러의 대명사였고, 듬직한 ‘맏형’이었다. 1989년 순경으로 경찰복을 입은 이후 28년간의 경찰 인생을 듣기 위해 지난 1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권 팀장을 만났다. 


퇴직을 앞둔 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팀장이 지난 17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 전반에 무력감과 분노가 쌓여 있는 위험한 상황”이라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프로파일러로서 첫 사건은 2001년 살인 사건이었을 겁니다. 아이를 성폭행한 후 토막 낸 범죄자를 면담하는 일이었지요. 그 후 범죄자를 1000명쯤 만나봤는데…. 사실 900명이 넘은 뒤부터는 더 이상 세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만난 범죄자는 다 기억합니다.”

권 팀장은 사건이 발생하면 범죄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간다. 그가 맡았던 사건은 현장 경찰이 수사를 하다가 꼬여버린 사건이 대부분이다. 수사기록은 최초 보고서만 몇 쪽 읽어보고, 현장 경찰은 만나지 않는 게 철칙이다.

“프로파일러가 현장 분석을 끝내기 전에 수사팀을 만나면 선입견이 생깁니다. 절대 수사팀을 먼저 만나면 안 됩니다. 또 하나 철칙은 모든 증거가 단 한 명을 용의자로 가리킬 때에도 그 사람이 진범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범죄 현장에서 자신이 ‘스펀지’가 된다고 했다. 증거와 현장을 분석하면서 자연스럽게 범죄자의 마음에 동화한다는 것이다.

프로파일러 업무 초기엔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하고 화가 많이 났었다고 한다. 권 팀장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990년대 중반까지는 프로파일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였다고 한다. 범행동기를 뚜렷이 감지할 수 있는 개인적 원한에 따른 범죄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사태를 전후로 사회 부유층을 겨냥한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등장했다. 이전과 달리 사회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과 분노가 밑바닥에 깔린 유형의 범죄였다. 경제 양극화, 불황, 냉혹한 시장 경제의 확대 같은 사회 변화가 범죄자에게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들어 ‘사이코패스’라고 하는 ‘악마’가 등장했다. 이때부터 프로파일러란 직업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권 팀장 역시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연쇄살인마와 마주해야 했다.

“악인은 태어나는 건지, 사회가 만드는 건지 질문은 정말 많이 받았는데. 모르겠어요. 나 같은 프로파일러는 태어나는 것인가, 만들어지는 것인가와 비슷한 질문인데…. 진짜로 모르겠네요.”


그는 지금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치안력이 잘 억제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폐쇄회로(CC)TV와 같은 안전망 구축과 과학수사 발달로 사이코패스를 조기에 잡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회전반에 무력감과 분노가 쌓이면서 일종의 분노 범죄가 우려되는 상황”이라는 말로 걱정을 내비쳤다. 현장을 떠나는 아쉬움도 크다고 했지만 후배들에 대한 믿음을 보였다.

“범죄자들과 만나는 데 지쳤다는 게 은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한 요인이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후배들에게도 현장을 접할 기회가 많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인원제한으로 잘 훈련된 프로파일러 지망생을 제대로 뽑지 못하는 실정이기도 하고요.”

권 팀장은 “당분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서 오는 6월 광운대학교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마무리하고, ‘권일용 프로파일링 기법’을 체계화한 책을 집필할 계획이다. 은퇴 후 삶을 그리느라 바쁜 요즘이지만 천상 ‘경찰’인 속마음을 감추진 못했다. “후배들이 제 도움을 필요로 할 때면 언제든 달려올 겁니다. 나쁜 놈을 잡는다는 데 마다할 이유가 있나요.”

박현준 기자 hjunpar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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