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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도쿄역 호텔과 양근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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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05 01:02:20 수정 : 2017-05-05 01: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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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역사의 2층에 있는 호텔에서 양근환 선생(작은 사진)은 친일파 인사 민원식을 처단했다. 이 건물은 지금도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독립기념관 제공
일본 도쿄역은 하루 4000여편의 열차가 오간다. 그래서 일본 철도의 심장부로 불린다. 이 건물은 러일전쟁 승리를 기념해 빅토리아 양식으로 설계됐다.

도쿄역은 우리의 항일운동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일본지역에서의 의열투쟁에 앞장섰던 양근환(1894~1950) 선생은 1921년 2월 16일 도쿄역에 있는 호텔 2층 14호실에 찾아갔다. 친일단체인 국민협회 회장 민원식이 도쿄에서 활동하기 위해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국민협회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을 받아 ‘시사신문’을 발간하여 내선일체론을 주장하며 조선인 참정권 운동을 벌인 어용단체다. 양근환 선생은 민원식을 찾아가 ‘유학생들이 환영회를 열 터이니 참석하겠느냐’며 대화를 하다가 단도로 배를 찔러 즉사시켰다. 거사 후 선생은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상해로 가는 배에 올랐으나, 뒤쫓아 온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1921년 5월 2일 도쿄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렸을 당시, 선생은 당당한 자세로 일본제국주의의 실상을 폭로하였으며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1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의 친일파 척결 소식은 재일 유학생들의 민족의식을 뜨겁게 달구었고 친일 앞잡이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1894년 5월 9일 황해도 연백에서 태어났다. 일제가 조선을 무력 침탈한 이후, 선생은 항상 조국의 독립을 절실히 염원했다. 천도교인이었던 선생은 평소 일제의 조선강점을 지지하거나, 독립을 주장하지 않으면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

선생은 열여덟살에 황해도 백천에 있는 동명학교를 졸업하고 스무살이 되던 1914년, 서울에 올라와 공업전습소를 다녔다. 선생은 고향집에 내려간 후 각처를 떠돌며 방랑했다. 그러던 중 조선보병대에 입교하였으나, 일본인과 싸움을 벌인 일로 일경에 체포돼 50일간 구류를 살았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선생은 더 이상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없게 되자, 그해 9월 일본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됐다. 선생은 니혼대학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선생은 가난으로 더 이상의 학업을 포기하고 말았다.

해방 후 선생은 혁신탐정사를 조직해 반공투쟁에 앞장섰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북한군에게 납치되어 고문을 당하던 끝에 1950년 9월 15일 경기도 파주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에 의해 안타깝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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