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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영현기자의역사항쟁지다시보기] 해외서 개교한 첫 정식 초등교 인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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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6-08 23:54:33 수정 : 2017-06-08 23: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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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시 루완구 마당로 셰청리에 있는 인성학교 옛터.
독립기념관 제공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이주한 한인들이 늘어나면서 이들 자제의 교육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이 때문에 설립된 교육기관이 인성학교(仁成學校)라 할 수 있다. 이는 1916년 9월 1일 출범한 상하이 한인기독교소학교를 계승하여 1917년 2월 설립됐다. 1918년 9월 상하이 고려교민친목회라는 한인단체가 조직되자 기독교소학교를 운영하던 한인교회는 학교 경영을 고려교민친목회에 넘겼다. 인성학교는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곽단체인 상하이 거류민단에 소속되어 의무교육 실시를 목표로 삼았다. 이는 사실상 해외에서 문을 연 첫 정식 초등교육기관인 셈이다.

인성학교의 교육 목표나 내용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육정책이 기반이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자주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교육을 방침으로 삼고 지·덕·체를 갖춘 인재양성을 중시했다. 교과목은 한국어와 한국역사 등 민족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며, 그 밖에도 한문·외국어 등을 교육했다. 학생수는 1916년도 개교 당시에는 4명이었지만, 점차 학급수가 늘어났고 유치원이 증설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50~70명을 유지했다. 인성학교는 1932년 4월 학교 인근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진 윤봉길의거 이후에 일제의 탄압으로 1935년 11월 폐교됐다.

이유필(1885∼1945)은 인성학교에서 가장 오랫동안 교장으로 재직했다. 1923년 교민단장 겸 인성학교 교장을 맡은 그는 한인 자제들에게 조선혼을 불러일으켰고 보습과정을 두었다. 또 도서관을 신축하는 등 교육에 누구보다도 의욕적이었다. 평북 의주 출신은 그는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신민회에 참여했다. 이후 이른바 ‘데라우치총독암살음모사건(일명 105인 사건)’에 관련되어 전남 진도에 1년간 유배당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일청·조봉길 등 한인 관리들과 동맹퇴직을 결의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교민단, 의사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사원, 내무부 비서국장 등의 책임을 맡았다. 이후 한국독립당의 기관지인 ‘상해신문’ 사장에 취임하여 차리석·이수봉·박창세 등과 함께 선전활동에 나섰다. 1933년 3월 9일 상하이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3년형을 받았다. 1945년 11월 29일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류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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