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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1904~1973)는 죽은 지 4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지구 반대편 이 땅에서도 인기가 높다. 그의 시보다는 영화로 더 친근하게 접한 사람들이 많을 게다. 1994년 이탈리아에서 처음 개봉했던 ‘일 포스티노’가 상징적이다. 국내에서는 2년 늦게 상영됐지만 네루다가 이탈리아의 한 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당시 우체부와 나눈 시에 관한 자연스러운 은유는 잔잔하게 관객들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정작 네루다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우체부 이야기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최근 국내 극장에 드물게 걸려 있는 영화 ‘네루다’도 같은 맥락이다. 이 영화는 네루다가 칠레 정부의 체포 압박을 피해 다니다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어렵게 탈출한 뒤 파리로 입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배경으로 설정했다. ‘일 포스티노’가 망명지 섬의 우체부와 나누는 시에 관한 서정적인 대화가 주조였다면, 이 영화는 네루다 뒤를 쫓는 비밀경찰 오스카를 통해 네루다를 말한다. 아예 오스카의 내레이션으로 시종일관하는 형식인데, 그는 네루다의 부르주아적 삶과 난만한 음주와 파티 행각을 관찰하며 자신의 업무에 대한 정당성을 다진다. 그러하지만 갈수록 네루다의 시에 빠져들면서 안데스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이어지는 국경선 눈밭에서 죽어가며 시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맥락이다.

영화에서는 시종 시를 암송하는 듯한 비밀경찰 오스카의 독백이 들린다. 그중 그가 가장 자주 언급하는 시는 ‘오늘 밤 나는 가장 슬픈 시를 쓸 것이다’라는 ‘스무 개의 사랑 노래와 한 편의 절망의 시 20’이다. 낭만적이고 관능적인 초기 시편, “오늘 같은 밤이면 그녀를 품에 안고/ 가없는 하늘 아래서 수없이 입맞추었지/ 그 초롱초롱하고 커다란 눈망울을 어찌 사랑하지 않았으랴”로 이어지는.

네루다는 곤살레스 비델라의 체포명령을 피해 다니던 그 시절(1948~1949) 덕분에 사교적인 생활에서 배제돼 꼼짝없이 시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가 대표작으로 내세우는 장시, 말 그대로 모두를 껴안는 ‘모두의 노래(Canto general)’도 완성할 수 있었다. 네루다의 마지막 거처, 산티아고 외곽 태평양가 ‘이슬라 네그라’에서 나는 그를 질시했었다. 살아서는 온갖 관능과 행복을 노래하고 만끽하며, 죽어서는 아름다운 풍광에 묻혀 있는 그를. 기실 그의 행복은 세상과 자연과 사람을 어떤 조건에서도 뜨겁게 껴안는 능력이었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내게로 온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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