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혁신도시에 조성된 택지에 들어선 4가족을 위한 집. 대지가 넓지는 않지만 활발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앞, 뒷마당 등 다양한 외부공간을 품도록 했다. |
가족이 변하고 있다.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새로운 가족의 개념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부모와 큰집, 작은집 등등이 모여 살던 대가족이 현대로 들어서며 부모와 아이가 사는 핵가족으로 바뀌더니, 요즘은 아예 부부만 살거나, 한부모와 아이, 혹은 혼자 사는 집 등 1∼2인 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사회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이겠지만 막대한 사교육비와 불안한 육아환경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늘어난 것도 큰 요인일 것이다.
이제는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 결혼을 했다가 헤어지고 각자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그렇게 가족의 개념이 바뀐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사회 시스템이 따라와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시스템은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고, 그동안 시장에 먼저 여러 가지 상품들이 나와 재빠른 대응을 하고 있다. 도시락, 마트에 진열된 소량 포장 상품, 일인용 티포트나 밥솥, 그리고 홀로 사는 사람들을 위한 원룸, 셰어 하우스, 고시원 등등의 다양한 주거형태….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는 하지만 어딘가 좀 쓸쓸해진다.
극단적인 예이긴 한데 세계적인 축구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대리모를 통해 자신의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기르고 있다. 호날두는 남녀가 만나 결혼-임신-출산-육아로 이어지는 고전적인 가족 구성의 방식을 택하지 않고, 미국의 한 병원에서 대리모를 통해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따로 사생활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경기를 관람하는 아이와 함께 있는 장면이 여느 가족 못지않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정겹다.
몇 년 전 지방의 어느 도시에 지은 지 50년 된 한옥을 고친 적이 있다. 세 칸짜리 가장 일반적인 일(一)자집이었다. 2.5평 크기 방이 두 개 붙어 있고 그 앞으로 2.5평 정도 되는 마루가 있고 4평 남짓한 부엌이 있는 10평(33㎡)이 조금 넘는 전형적인 민가였다.
집을 지은 사람이 아이들을 다 키워 대처로 보내고 세상을 뜰 때까지 살던 집이었는데, 관리를 무척 잘해서 조금 낡은 느낌이 드는 것 외에는 당장 들어가 살아도 문제가 없을 듯했다. 우리는 최소한의 공사로 집을 고쳤다. 사실 고쳤다기보다는 열심히 청소를 했다고 보아도 될 정도였다.
공사를 끝낸 다음 사람들을 모아 집들이 행사를 했다. 집을 고칠 때 수고한 사람들과 주인의 지인들이 모두 그 좁은 집에 모여서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회상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 세 칸짜리 집은 그 당시 사람들의 공통분모와도 같은 주택의 전형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이 불쑥 “나도 이런 집에서 어릴 때 살았었는데…” 하며 말문을 열었다. 방 두 개짜리 열 평 남짓한 집에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손자, 손녀까지 삼대가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심지어 어떤 이는 방 두 개 중에 하나는 신혼부부에게 세를 주고 방 하나에서 삼대 여덟 식구가 다 살았노라고 이야기했다.
그 이야기가 나오자 모두 “나도, 나도” 하며 거들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혹은 그 경쟁에서의 가장 최고라도 된 듯 으쓱함이 느껴졌다. “큰형은 부엌 위 다락에서 독방을 썼고 저쪽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막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하고 잠자리 배치까지 이야기하며 한껏 자랑을 했다. 지금처럼 입식 가구와 가전제품이 집을 온통 점령하기 전, 하나의 방이 이불을 펴면 침실이 되고 상을 펴면 식당이 되고 공부방이 되던, 지난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야기다.
계단실에서 바라본 거실과 책장. |
돌이켜 보면 나의 유년기와 청년기를 관통했던 20세기의 후반 동안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족이 변했고 집이 변했다. 물론 살았던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나처럼 서울시내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은 훨씬 다이내믹한 주거의 변천을 맛볼 수 있었다.
나는 디귿(ㄷ)자 형식으로 생긴 도심형 한옥에서 자라고 서울 외곽의 신흥 주택지역의 ‘집장사 집’에서 살아보았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비온 다음에 죽순 자라듯 서울 전역을 무섭게 뒤덮었던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그리고 우리나라 주거문화의 절정인 아파트까지 모든 형태의 주거형식을 다 겪어봤다. 그 무렵 주택을 정주의 개념이 아닌 유목민의 텐트처럼 여기고 언제나 옮길 준비가 되어 있는 도시 유목민의 라이프 스타일이 생겨났다.
2013년을 기점으로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어섰고, 대다수의 국민들이 아파트라는 형식의 공동주택에서 살기를 바라고,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국민주택’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는 정부에서 국민주택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건설 또는 개량한 85㎡(약 25.7평) 이하의 주택을 말한다. 그런데 이 ‘25.7평’이라는 규모는 어떤 근거로 정해졌을까. 1970년대 이후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주택 부족이 심각해지자 197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정부는 주택건설촉진법을 제정해 10년간 250만호의 주택을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1973년 2월 주택법 시행령을 만들어 국민주택 규모를 정했는데, 당시 실무진에 의하면 국민 한 사람당 필요한 주택면적을 5평으로 보고, 5인 가족 1가구를 기준으로 삼아 25평으로 산출했다 한다. 이것이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82.63m²인데 좀더 명확한 숫자로 정리하다 보니 85m²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4∼5인 가족을 기준으로 삼은 이 규모가 지난 40여년간 실시된 주택정책의 근간이 되어왔는데, 근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가족 구성원의 변화로 인해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국민주택의 규모를 재정립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전남 나주혁신도시는 참여정부의 공기업 지방이전 정책에 의해 많은 기관들이 새 사옥을 짓고 그에 따른 주거 및 상업시설들이 들어서며 새로 만들어진 도시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이사하여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나주는 특산품인 ‘배’나 나주곰탕 등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나주가 본인 성씨가 무척 많아 성향공원이 생길 정도이고, 전주와 더불어 전라도라는 이름을 구성하였던 내력이 있는 도시다. 원래 도시라기보다는 농업이 주된 산업인 곳이, 단 몇 년 사이에 인천 송도나 행정수도인 세종시 못지않은 큰 스케일의 도시로 거듭났다.
그러나 나주역에서 내려 현장을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는 그런 번화함 같은 것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곳에 서울에서 살다가 회사를 따라 이사 온 가족의 집을 설계하게 되었다. 그들은 여러 군데 새로 지어진 아파트 대신, 이왕이면 마당이 있는 집에서 활발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게 하고 싶었고, 나무도 심고 정원도 가꾸고 싶었다고 한다.
계획도시 한복판에 조성된 택지는 역사나 전통과는 거리가 먼, 논과 밭을 갈아엎어 만든 곳이었다. 멀찍이 언덕에 과장된 형태의 전망대가 하나 있고, 주변에 잘 드는 칼로 잘라놓은 두부 같이 썰려 있는 택지들이 매끈한 단지도로를 끼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놀이터가 있고 평평하고 편안한 땅이었지만 아무런 특징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땅의 흔적과 땅의 에고를 뭉개놓은 택지 앞에서는 항상 좌절을 느낀다. 땅이 가진 리듬에 맞춰 스텝을 밟아야 하는데 흘러나오는 박자가 없다. 그런 곳에서 건축을 하는 것은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고 귀를 막고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아주 난처하다. 그러나 우리는 집을 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이라는 것을 꺼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인간에게 상상력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가.
# 가족들이 중용을 지키며 즐거운 모의를 꾸미는 집
애초부터 소수의 구성원이 아니었다고 해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가족이 따로 살게 되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가장 흔한 이유를 꼽자면 아이의 조기교육을 위해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 아빠가 ‘기러기’가 되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돌봐야 할 가족이 눈에서 멀어진 것이 한편으로 편할 수도 있겠지만, 가족과 떨어져 그저 필요한 비용을 대는 역할을 하게 된 가장이 홀로 살아가는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혹은 가장의 직장이 다른 지역에 있다든가 하면 발달된 철도망의 도움을 받아 장거리 출퇴근을 하기도 하지만, 무척 고된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아예 온 식구가 함께 이주하는 경우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증가했다.
이 집 역시 한창 뛰어놀 나이의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주택을 마련하기로 한 전형적인 4인 가족을 위한 집이다. 조용하지만 무척 결단력이 있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아빠와 늘 웃는 얼굴을 한 명랑한 성격의 착한 엄마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에너지가 넘치는 두 아이들이 살 집이었다.
핵가족이라 부르는 두 세대가 사는 집이며 엄마·아빠·딸·아들 네 식구가 사는 집. 무언가 가장 표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화수분처럼 집의 재산을 늘려줄 것이라고 기댈 언덕으로 여겨왔던 아파트에서 가족이 구상하고 가족이 정주하는 집을 짓는다는 것은 좀 달라야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집의 이름을 ‘적당과 작당의 집’이라고 미리 정해서 왔다. ‘적당’하다는 것은 넘치지 않도록 중용을 지킨다는 의미일 것이고, ‘작당’은 식구들끼리 화목하게 즐거운 모의를 하겠노라는 선언으로 들렸다.
평이한 듯하지만 비범한 두 개의 단어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의 가족 구성에는 다소 넘치는 공간을 두개 층에 만들었다. 어린 두 남매와 함께 즐겁게 지내기 위한 공간을 다양하게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부모와 같은 방에서 살다가 성장에 따라 독립할 수 있는, 가족 간에 적당한 거리를 부여하는 집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1층은 2층까지 크게 열린 거실과 실질적으로 집의 중심이 되는 주방과 식당, 그리고 연결되는 안방과 온실로 구성했다. 살림을 위한 동선이 최대한 짧아지도록 욕실과 세탁실, 다용도실을 현관 주변 한쪽으로 모아두었다. 거실의 바닥을 지면보다 조금 낮추어 입체적인 공간감이 확장되도록 했고, 아이들이 숨기도 하고 누워서 구르기도 하고 발을 까닥거리며 책을 볼 수도 있게 계단참을 이용한 서재도 구성했다.
2층은 아이들이 크면 나누어 쓸 수 있는 커다란 침실을 두고, 지붕의 단면을 이용해서 네모난 공간이 아닌 다양한 삼각형을 뒤집어쓰고 있는 방들을 넣었고 나중에 그곳에서 벌어질 풍경을 그렸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2층 레벨에서 쉽게 들어갈 수 있도록 1층 지붕 아래 공간에도 다락방을 넣는 등, 구석구석에 참호처럼 놀이공간을 벌여놓았다.
집은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가족이 모여 음악을 듣고 그림을 그리는 쉼터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희미해져가는 부모와 자녀의 구성으로 이뤄진 가족의 마지막 단위의 집을 만들며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다소 축소된 의미일지라도 집이란 가족에게는 거친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안온한 덮개라고 생각한다. 물론 예전처럼 대를 이어가며 살게 될 집은 아닐 것이다. 다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부모가 집을 짓는 과정을 부모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기억하는 집이 될 것이다.
임형남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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