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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1592년 7월, 한산대첩과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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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11 22:30:39 수정 : 2017-07-12 03: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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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익진 전술’로 일본 수군 물리쳐 대승
휴가철 한산도 충무공 유적 찾아보길
지금부터 425년 전인 1592년 7월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과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맞섰다. 1592년 4월 13일 조선을 침공해 불과 두 달 만인 6월에 평양성까지 점령했던 일본군의 침공은 더 이상 이뤄지지 못했다. 서해 바다를 장악해 수군을 통해 병력과 군량을 보급하려고 했던 일본군의 작전이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조선군 반격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이었다.

이순신은 5월 7일 옥포해전의 승전에 이어, 5월 29일부터 6월 10일까지 전개된 사천해전에서 처음으로 거북선을 활용해 대승을 거뒀으며, 당항포 해전에서도 연이어 승전보를 올렸다. 이순신 함대의 출동으로 바닷길을 통한 물자 보급이 어려워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욱 일본 수군을 채근했다. 다급해진 왜장 와키자카는 70여 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견내량에 도착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바깥 바다에 머무르며 지형을 살폈다. 포구가 좁아 판옥선이 서로 부딪칠 위험이 있고 적이 쉽게 육지로 도망칠 수 있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한산도 앞바다로 왜선을 유인하도록 했고, 이어 7월 8일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판옥선 50여 척과 거북선의 총통에서는 불을 뿜어냈고, ‘학익진’(鶴翼陣)이라는 세계해전사에도 돋보이는 전술이 전개됐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 7월의 기록에는 “이순신이 왜병을 고성 견내량에서 크게 격파했다. 원균이 앞서 승리에 자신해 곧장 대적해 격파하려 하자 순신이 말하기를 ‘이곳은 항구가 좁고 얕아 작전할 수가 없으니 넓은 바다로 유인해 내어 격파해야 한다고 했다. 원균이 듣지 않자, 순신은 ‘공이 병법을 이처럼 모른단 말인가’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거짓 패해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과연 기세를 몰아 추격했다. 이에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군사를 돌려 급히 전투를 개시하니 포염이 바다를 뒤덮었고 적선 70여 척을 남김없이 격파하니 피비린내가 바다에 진동했다. 왜진(倭陣)에서 전해진 말에 의하면 ‘조선의 한산도 전투에서 죽은 왜병이 9000명이다’고 했다”고 한산대첩의 승전을 기록하고 있다. 유성룡 또한 ‘징비록’에서 “일본은 본시 수륙이 합세해 서쪽으로 처내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이 한 번의 해전에 의해 마침내 그 한 팔이 끊어져 버린 것과 다름이 없이 돼 버렸다. 이로 인해 전라·충청도를 보전했고 나아가 황해도·평안도의 연해지역까지 보전할 수 있었으며, 군량을 조달하고 호령을 전달할 수 있었기에 국가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여 한산대첩의 의미를 기록했다.

현재 한산도에는 이순신 장군을 기억하는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제승당(制勝堂)은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 시절 운주당(運籌堂)으로 불렸던 곳으로, 지휘 본부로 활용됐다. 한산정(閑山亭)은 장군이 활쏘기를 했던 곳으로 바다를 넘어 표적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수루(戍樓)는 관측 초소로, 이곳에서 지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로 시작하는 장군의 시조가 맴도는 곳이다. 여름철 한산도를 찾아 그 앞바다에서 425년 전 울려 퍼졌던 승리의 함성을 떠올려 보는 것은 어떨까.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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