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소속 외교관의 부하여직원 성폭행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 사건 조사 책임자인 외교부 당국자가 ‘성폭력 원인은 인간 본성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을 드러냈다.
주 에티오피아 대사관 성폭력 사건 조사를 책임지는 외교부 당국자는 12일 기자들과 만나 “누가 들여다보지 않으면(‘감시가 없으면’이라는 취지)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같은 발언은 외교관 성폭력 사건이 재외공관을 중심으로 끊이지 않는 데 대한 이유를 묻는 과정에서 나왔다. 이 당국자는 “인원이 너무 적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외교관들의 복무기강을 확립하는 데 문제가 많다”며 외교부 인력을 확충하면 사고 발생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본부에서 근무하는 분들과 재외공관에서 근무하는 분들의 비위발생 빈도를 보면 너무나 명확하다. 누가 들여다보고 있으면 아무래도 그런 일이 덜 벌어지는 것이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이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라며 “외교부 본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얘기는 못 들어보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발언은 사실과 다르다. 서울 도렴동 외교부 본부 건물 내에서 외교부 서기관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여성들의 신체를 몰래 촬영하다 적발돼 최근 기소됐다. 2015년에는 외교부 본부 소속 간부가 해외 출장을 갔을 때 동행한 부하직원을 성폭행한 사건도 발생했다.
특히 ‘성폭력 원인이 인간 본성에서 시작된다’는 논리는 성폭력을 가해자 입장에서 합리화해 온 고전적인 편견이자, 가장 대표적인 왜곡된 성인식 표현으로 꼽힌다. 가령 반성폭력 운동 단체들은 캠페인 일환으로 언론기사나 판결문 등에서 과거 성폭력 사건을 다루면서 수식어구처럼 관행적으로 쓰였던 ‘욕정에 못 이겨’라는 문장 퇴출 캠페인을 수년 전에 펴기도 했다. 특히 이번 에티오피아 주재 외교관 성폭력 사건은 가해혐의자가 상사이고 피해자가 가해자의 직속 부하직원이자 계약직 여성 직원으로 상대적 약자라는 점에서 권력관계가 반영된 성폭력 사건의 전형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취재진 중 일부가 “그 발언은 굉장히 조심스러운 것 같다. 인간의 본성 문제는 아니지 않느냐”고 되묻자 이 당국자는 “제 개인적 견해다. 외교부 공식 입장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성폭력과 인간 본성을 연관짓는 인식은 성폭력이 용인될 것이라는 믿음을 줌으로써 성폭력 사건을 거듭 촉발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이라고 지적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연구팀의 노선이 활동가는 “사건의 중대성을 판단해야 할 조사책임자로서 책임을 져야 할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노 활동가는 “최근 여교사를 상대로 한 중학생들의 집단 자위 사건에서도 사건의 중대성을 판단해야 할 교육부 관계자가 비슷한 방식으로 발언한 바 있다”면서 “그런 식의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성폭력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거나 조사, 판단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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