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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기억해야 할 여성 독립운동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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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8-24 23:31:58 수정 : 2017-08-24 23: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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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암살’ ‘밀정’서 일부 언급 / ‘뜨거운 항쟁’ 헌신적 노력 주목해야
8월은 다른 어느 달보다 나라와 민족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1910년 8월 22일 창덕궁 흥복헌에서 합병조약이 체결되고, 8월 29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강제병합됐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36년 만에 광복을 맞이했다.

광복의 과정에는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활약한 독립운동가의 헌신적인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김구, 윤봉길, 이봉창, 김상옥, 박열 등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지만, 유관순 의사를 제외하면 여성 독립운동가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다. 최근 ‘암살’이나 ‘밀정’과 같은 영화에서도 일부 언급됐지만,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도 줄기차게 전개됐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1862~1927) 여사는 아들이 순국한 후 안 의사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로 이주한 후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각성에 크게 기여했다. 1922년에는 상하이로 들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남자현(南慈賢·1872~1933) 의사는 ‘암살’ 여주인공의 실제 모습과도 많이 닮아 있다. 남편이 의병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후 유복자를 기르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요녕성으로 이주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했으며, 10여 개의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권 신장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5년 일본 총독 사이토의 암살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다가 실패한 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단체의 협력에 힘을 기울였고, 1933년 다시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살해 시도 후 체포된 후 하얼빈에서 순국했다. 윤희순(尹熙順·1860~1935) 의사는 한말 최초의 여성 의병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895년 단발령이 계기가 돼 일어난 을미의병, 1907년 군대의 강제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 때 여성으로 구성된 의병대를 조직해 항전했다. 의병 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안사람 의병가’ 등 의병가를 지어 내기도 했으며,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1935년까지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했다.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權基玉·1901~1988)은 비행사가 돼 조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다. 3·1운동을 전후한 시기 평양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권기옥은 중국으로 망명한 후, 1923년 중국의 운남육군항공학교에 입학해 비행사가 됐다. 이후 중국 공군의 비행사로 복무하면서 항일전선에서 활약을 했으며, 1943년 중경 임시정부에서는 한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해 여성의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외에도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한국인의 애국정신을 고취한 김마리아(1891~1944) 선생, 간호사 출신의 독립단체인 ‘간우회’를 조직,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자혜(朴慈惠·1895~1943) 선생은 남편인 단재 신채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잃어버린 나라의 주권을 찾기 위해 생애를 바친 수많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활동과 노력은 독립운동에 큰 힘이 되었고, 광복이라는 열매의 쟁취에 일조를 했다. 뜨거운 날들이 계속되는 8월, 조국을 위해 뜨겁게 살아갔던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기억했으면 한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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