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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거인’ 2차 국공합작 1937년 9월22일 중국의 국민당 정부와 공산당이 제2차 국공(國共)합작에 합의한 것은 ‘잠자는 거인’이라는 중국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1924년 1월20일 광저우(廣州)에서 이루어진 제1차 국공합작이 군벌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2차 국공합작은 일본 침략에 공동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이라는 막강한 외세의 침략 앞에 중국의 모든 인민이 단합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데에 중국의 비극이 있었다.

당시 중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는 “국내의 적을 일소한 다음에 외국의 침략을 물리치겠다”는 안내양외(安內攘外)정책을 내세웠다. 심지어 일본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을 하고 이듬해는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마당에도 국민당군의 총부리는 주로 홍군을 겨냥했다. 장제스는 외국기자들에게 “중국(국민당)의 경우 일본은 피부병이고 공산당은 심장병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정부군의 토벌작전에 견디지 못한 홍군은 1934년 10월 중국 남서부인 장시(江西)성 일대에서 서북부 산시(陝西)성 연안까지 도피하는 1만2500㎞의 대장정을 해야 했다. 산시성을 출발했던 약 8만5000명의 홍군 가운데 옌안까지 도달한 인원은 그 10분의 1인 8500명 수준이었다. 그런 정도의 인명 손실이야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하찮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으로 가뜩이나 아쉬운 전력이 그런 식으로 사라져서야….

중국은 고대부터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어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를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했으나 그것이 거꾸로 적용된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민심이 깨어났다. 중국에서 고래로 ‘민심은 천심’이라며 존중받으면서도 막상 천대만 받아온 민심이 자각하게 됐고, 그래서 거인은 깨어난 셈이다.

상하이와 베이징 등 대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려 장제스에게 왜 일본군이 아닌 동포에게만 총부리를 겨누느냐고 항의하는 데는 장제스의 철권정치도 다른 선택이 없었다.

양평(언론인)

△1851년 9월18일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 창간

△1931년 9월18일 일본이 남만주 철도 파괴를 조작해 만주사변 일으킴

△1898년 9월19일 아프리카서 영·불 식민정책이 충돌한 파쇼다사건 발생

△1875년 9월20일 일본 해군의 신형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불법침입

△1898년 9월21일 청나라의 개혁을 시도한 무술변법 좌절

△1937년 9월22일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 성립

△1973년 9월23일 후안 페론, 18년 만에 아르헨티나 대통령직 복귀

△1946년 9월23일 미 군정치하에서 철도총파업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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