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욕설과 폭언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밀치고 때리는 등 물리적 폭행으로 확대됐다. 참다 못한 A씨가 이별을 고하자 폭력은 더욱 심해졌다.
B씨는 A씨의 직장과 집 근처를 배회하며 끊임없이 만남을 요구했다. A씨가 거절하자 ‘자살하겠다’, ‘죽여버리겠다’며 협박을 일삼고 자해소동까지 벌였다.
B씨의 폭력은 A씨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는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급기야 최근에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뒀다.
데이트폭력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최근 급증하는 데이트폭력은 몸에 상처를 남기는 것은 물론 정신마저 황폐화시켜 사회생활을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 이성교제를 한 여성 2명 가운데 1명이 신체적 폭력을 포함한 언어·정서적 폭력 등 데이트폭력을 당했고, 피해자들은 모두 복합성외상후스트레스장애(CPTSD:장기간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신체·정신적 폭력 등으로 인한 정신적 외상) 증후군을 경험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17일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가 최근 두 차례에 걸쳐 20∼30대 미혼여성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 데이트폭력 실태 및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성교제 경험이 있는 1316명 중 52%인 638명이 데이트 폭력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들은 모두 CPTSD 증후군에 해당하는 정서조절 곤란, 부정적인 자기지각,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인식 등 삶의 의미체계 변화 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CPTSD 증상을 호소한 피해자 중 18.2%(124명)는 치료하지 않을 경우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속적인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만성 수준으로 진단된 것으로 파악됐다.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심리적 피해를 정량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국내에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유사한 CPTSD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맺기에서 시작된 심리적 병증이기 때문에 사회적 관계 형성과 유지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연구는 데이트폭력 피해자가 겪는 심각한 심리적 후유증을 수치로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데이트폭력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에서 생기는 범죄로, 단기간 해결이 쉽지 않고 피해자도 스스로 자신의 심리·정서적 피해를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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