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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문화재]동궐과 종묘 잇는 복원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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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02 20:54:19 수정 : 2017-11-02 20: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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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6년 태종은 동궐인 창덕궁과 종묘(사진)를 잇는 문을 만들도록 지시한다. 앞선 임금들이 종묘에 제사를 모시러 가는 것이 1년에 한두 번에 불과하고, 종묘에 갈 때마다 성대한 의식을 치르는 것이 지나치게 번거로우므로 태종 자신은 연중행사로서 보다 검소하게 종묘에 갈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1년 후인 1417년 음력 1월 9일, 태종은 신하와 함께 이 문을 통하여 종묘로 향했다. 500여 년이 지난 1932년 4월 22일, 종묘와 동궐 사이에 폭 22m, 길이 660m의 큰 도로가 뚫렸다. 이로 인하여 담을 맞대고 있던 동궐과 종묘는 둘로 갈라지게 되었으니, 지금의 율곡로다.

최근 이 길을 터널로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동궐과 종묘를 잇는 계획이 발표되었다. 단절되었던 지맥(地脈)을 잇고, 종묘와 창덕궁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일이니 매우 환영할 일이다.

종묘는 역대 임금을 기리는 유교사당으로, 영혼들이 편히 쉬는 곳이다. 종묘 뒤편에 넉넉한 숲을 둔 것도 돌아가신 선대 임금의 영혼이 편히 거닐고, 땅으로 이어지는 지기(地氣)를 온전히 보전하기 위함이다. 종묘 안에 위치한 각 건물은 지맥의 흐름에 따라 건물의 향이 다르다. 흙을 덮는 것도 지세(地勢)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일이다.

종묘 북문(北門)의 위치도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태종이 문을 만들 것을 지시한 것은 1416년 1월이며, 창덕궁 동남 협문에서 종묘 북쪽 담으로 통하는 세자전 서쪽 문에 담을 쌓도록 한 것이 9월, 종묘 북쪽 담에 난 문을 지나 걸어간 때는 1417년 1월이다. 창덕궁에서 종묘로 갈 때 창덕궁 동남협문을 지나 종묘 북문을 거친 것이다. 한편 종묘의궤와 일제강점기 배치도에 나타난 북문은 종묘 정전과 전사청의 가운데 뒤쪽, 창경궁 쪽에 치우진 곳에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창경궁은 창덕궁과 종묘를 잇는 문이 만들어진 이후에 건립되었으며, 두 궁궐 모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적지 않은 부분이 변형되거나 훼손되었고, 1830년경 동궐의 모습을 그린 동궐도(東闕圖)에 나타난 창덕궁은 지금과 많이 다르다.

오늘날 서울을 위시하여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를 중심으로 역사의 일부를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이러한 재현이 우리 시대에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문화재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것인지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여야 한다. 문화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자,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위대한 유산이기 때문이다.

조상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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