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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 1917년 11월6일 러시아에서 발발한 러시아 혁명(볼셰비키혁명)이 100주년을 맞았으나 축하 열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소식이다. 그것은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의 요란했던 기념식과 너무 대조적이다.

러시아 혁명의 너무 쉬운 성공이 역으로 썰렁한 100주년의 원인이 됐을 수도 있다. 볼셰비키스트들은 혁명 다음 날인 11월7일 사실상 권력을 장악해 80년간 놓치지 않았다.

반면 프랑스 혁명은 시작만 뚜렷할 뿐 그 끝 시점도 애매하다.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난 1794년 일까, 아니면 워털루 전투가 끝난 1815년 일까? 나아가 1830년의 ‘7월혁명’이나 1848년의 ‘2월혁명’, 그리고 1871년의 파리코뮌은 프랑스혁명의 일부일까 아닐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혁명은 보다 세련되고 대중에게 다가간 점이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다시 등장한 부르봉 왕가를 비롯한 구세력의 모습에서 민중은 새삼 혁명의 의미를 되찾기도 했다.

철학사가 윌 듀런트는 “그들이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고 했다. 그 참담한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않은 채 지난날 자신들의 특권은 하나도 잃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빅토르 위고는 ‘레미제라블’에서 1832년 폭동 중 파리의 하수도를 헤매는 주인공 장 발 장을 통해 프랑스 혁명을 이어갔다.

러시아 혁명도 그런 좌절을 겪었더라면 보다 세련되고 현실적인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적색혁명을 좌절시키기 위해 일어난 백군이 승리해 로마노프 왕조가 다시 집권했다면 어찌 됐을까?

혁명 10년 전 ‘어머니’를 썼던 막심 고리키는 이제 그 속편인 ‘아들’이나 ‘딸’을 썼을지 모른다. 여기서 주인공 파벨은 문맹이었던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를 주입시키는 대신 신세대들을 깨우침으로써 혁명은 보다 원숙해지는 길을 걸었을지 모른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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