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성은 한국 최초의 유럽 미술유학생으로 알려져 있다. 1900년 서울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배운성은 10대시절 백씨 가문에 서생(書生)으로 들어갔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의 큰 전환기가 되었다. 백씨 아들의 말동무 겸 뒷바라지를 위해 일본에 함께 간 배운성은 1919년 와세다대 경제과를 거쳐 1922년 독일 유학길에 오르는 행운을 얻었다. 유학 생활 중 독일에 혼자 남게 된 그는 미술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서 베를린국립미술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으며, 각종 전람회에 입선하면서 화가로서 명성을 쌓았다.
한국의 토속적인 감성과 향수를 담은 그의 작품들은 서양인들에게 이국적인 신비감을 주었다. 베를린과 파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지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배운성은 2차 세계대전 발발을 계기로 1940년 귀국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홍익대 미술과 초대 학장을 지냈다가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월북했다. 북으로 간 배운성은 평양미술대 교수를 지냈으며, 1978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가족도’는 2013년에 등록문화재 제534호로 등록되었다.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 보존가치가 높다고 인정되는 것을 문화재로 등록하여 관리하는데, 근대기 회화 작품 15점 가운데 이 그림도 포함되었다. 배운성의 유럽 활동시절 대작 유화라는 점을 인정받았지만,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는데, 바로 한동안 금기시되었던 월북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분단국가의 이념과 체재의 장벽을 걷어내고 오롯이 작품성을 평가하여 지속해서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인정을 받았다. 이는 남북 분단으로 분절된 한국 근대 미술사를 복원하는 신호탄 역할을 한 것이다. 앞으로도 근대기 미술 분야 연구가 폭넓게 진행되어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는 작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박윤희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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