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첫 주말, 직장인 김모(30)씨는 별다른 약속이 없다. 약속을 일부러 잡지도 않았다. 그는 주말 내내 자신의 원룸에서 잠을 자다 배 고프면 일어나 먹고, 또 졸리면 잘 생각이다. 김씨는 몇 달 전부터 주말에는 거의 바깥 출입을 하지 않는다. 주말에 얼굴 좀 보자고 연락해오던 친구들도 이젠 ‘집돌이가 다 됐다’며 냉랭해졌다.
김씨는 왜 주말마다 ‘두문불출’하고 있을까. 그는 “지난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는 매일 같이 힘이 넘쳤는데, 요즘에는 쉽게 피로해지고 무기력해진다”며 “그래서 푹 쉬려고 주말에는 시간을 비우고 버릇처럼 잠을 자면서 집 안에만 있게 됐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그런데 주말을 잠에 취해 보내고 나도 월요일 출근할 때면 또 피곤하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2017년을 한 달 남기고, 김씨처럼 삶의 여유나 활력을 잃고 심신에너지 고갈에 빠졌다는 이들이 적잖다. 우리나라 직장인 10명 중 8명 이상이 경험했다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소진 증후군)’ 때문이다. 연간 노동시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300시간이나 많은 우리나라. 이렇다 보니, 직장인 가운데는 주말을 자기 자신을 위한 ‘휴식시간’이 아닌 일을 위한 ‘충전시간’으로 보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난해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1032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의 88.6%에 해당하는 914명이 ‘번아웃 증후군을 겪은 적이 있다’고 답변했다. 번아웃 증상이 나타난 이유(복수응답)로는 ‘체계적이지 못한 업무 진행 때문’이라는 답변이 65.3%로 가장 많았고, ‘과도한 업무량’(58.9%), ‘업무를 하면서 부딪치는 대인관계의 어려움(32.9%), ‘갑이 다수 존재해서’(31.8%) 등의 순이었다.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윤대현 교수의 ‘번아웃 증후군 자가 진단 체크리스트’에 따르면 ▲맡은 일을 수행하는 데 정서적으로 지쳐있다 ▲일을 마치거나 퇴근할 때 완전히 지쳐 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할 생각만 하면 피곤하다 ▲일하는 데 심적 부담과 긴장을 느낀다 ▲업무를 수행할 때 무기력하고 싫증을 느낀다 ▲현재 업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었다 ▲맡은 일을 하는 데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나의 직무 기여도에 냉소적이다 ▲스트레스를 풀려고 쾌락을 즐긴다 ▲최근 짜증과 불안이 많아지고 여유가 없다 등의 증상 중 3개 이상이 해당하면 번아웃 증후군을 의심할 수 있다.
우리 전문가들도 ‘번아웃 증후군’을 개인의 증상으로 치부하는 것을 경계하고 회사와 국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 대학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의 번아웃 증후군은 우리 사회의 긴 노동시간과 큰 관련이 있다”며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낮추기 위해 잦은 야근과 회식 등을 줄이는 환경을 만드는 것도 번아웃 증후군을 예방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조언했다.
김선영 기자 00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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