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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이 평등한 세상 꿈꾸며… 동학군 ‘처절한 전쟁’

입력 : 2018-06-19 20:56:17 수정 : 2018-06-19 20:5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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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학회, 22일 충북 영동서 학술세미나/‘내 자식·내 후손 반드시 신분 해방/ 사람답게 사는 세상 만들자’ 결기/ 당시 외무대신 김윤식의 편지에/
‘신식소총 무장한 일본군 1명이/ 동학군 수천명 상대할 수 있다’ 적어/ 동학군, 기껏해야 칼·창 들고 대항
일제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전쟁은 생명을 다해가던 조선의 결정적 장면이자 동학 천도교 역사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일본군의 근대화된 무기 앞에 절대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었으나 동학농민군의 저항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것은 말기 조선의 첨예화된 모순에 맞서 제시된 교리가 당대에 ‘동학바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전쟁의 중심지였던 충북 영동군에서 ‘동학의 글로컬리제이션 : 동학농민혁명과 충청도 영동’을 주제로 한 동학학회의 학술대회가 오는 22일 열린다. 당시 동학농민군의 전투 양상과 그것의 밑바탕이 되었던 교리 등을 소개해 주목된다. 

동학농민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일제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수적인 우위를 보이기는 했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관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전력의 절대적인 열세에도 이들은 저항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일본군 1명이 농민군 수천명을 상대할 수 있다”

동학학회가 세계일보에 미리 공개한 발표문 중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의 글 ‘북접농민군의 전투방식과 영동 용산전투’는 당시 벌어진 전투의 양상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신 교수에 따르면 당시 동학농민군의 병력은 관군, 일본군으로 구성된 진압군에 비해 월등히 많았으나 무기의 큰 격차로 인해 패배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1894년 봉기 당시 외무대신이던 김윤식은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군 1명이 비도(匪徒·동학농민군) 수천명을 상대할 수 있고 경병(京兵·관군) 10명이 비도 수백명을 상대할 수 있다”며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기계(무기)가 예리한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적었다. 김윤식의 인식이 과장된 것이기는 하나 무기의 차이는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변수인 것은 분명했다.

이해 10월 23일 벌어진 이인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수만명’에 달하는 호대한 군세”였으나 일본군, 관군의 신식소총 앞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관군은 최대 사거리가 1.6㎞에 달하는 신식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동학농민군은 겨우 수백명이 화승총을 지녔고, 대부분은 “칼이나 창을 들고 싸웠거나 빈손으로 같이 다녔을 뿐”이었다.

동학농민군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우금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상황을 담은 기록은 “일본인 군관이 군사를 나누어 산허리에 나열하여 일시에 총을 발사하고 다시 산속으로 은신하였다. 또 산허리에 올라 일제히 발사하였는데 40, 50 차례를 이와같이 하였다. 시체가 쌓여 산에 가득하였다”고 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동학농민군은 “종일 출몰하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하면 올라와서 시험해보고, 총을 쏘면 몸을 섬광과도 같이 번쩍 피하였다”고 한다. 

동학농민군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우금치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세워져 당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평등한 세상에 대한 전망과 신념, 전투 참여의 밑바탕

동학농민군이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맨 몸으로 맞서다시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고려대 김춘옥 교수는 동학이 교리를 통해 제시한 “신분제 해체를 통한 평등한 권리와 서로 도와 살리는 목숨 유지의 안전망”을 꼽았다. 그는 발표문 ‘문학작품에 나타난 영동 동학농민군 활동 양상 연구’에서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던 홍종식의 회고담을 소개했다. 홍종식은 “동학 바람이 사방에 퍼지는데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만민평등을 표방했기 때문”이라며 “죽이고 밥이고 아침이고 저녁이고 도인(道人·동학교도)이면 서로 먹으라는 데서 식구같이 일심단결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당장의 이익이기도 했지만 “내 자식, 내 후손은 반드시 해방시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기”로 발전했고, 목숨을 걸고 전투에 참가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수백년간 이어진 신분제의 관념과 관습은 동학 교도들 역시 일시에 떨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학 조직 내에서 신분이 낮은 이들이 지도자로 정해지면 알력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종교적 수양이었다. 김 교수는 “동학 도인은 주문과 수련을 통해 정신적인 성장과 인격 수양으로 관습의 장벽을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도 있었다”고 분석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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