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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500년 세월 넘어… ‘천상의 울림ing’

입력 : 2018-06-22 10:00:00 수정 : 2018-06-21 09: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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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현재 ‘공존의 도시’ 빈 / 빈 소년 합창단의 일요일 성가 / 베토벤·모차르트·슈베르트… / 한 시대 향유한 천재들의 음악 / 과거의 영화 간직한 쇤브른궁 / 시간이 흘러도 변치않는 것들 / 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
청아한 미성이 퍼지자 회당 안의 작은 움직임조차 멎는다. 혹여 내뱉는 큰 숨 한 번에 귓가에 머물던 소리가 날아갈까 숨마저 잘게 나눠 뱉는다. 회당 안으로 퍼져나가던 소리가 점차 커지며 몸을 휘감는다. 가만히 서있는데도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린다. 손끝의 미세한 떨림이 느껴진다. 미성의 울림이 최고조에 이르자 이 떨림은 머리끝까지 전달된다. 평소 느끼지 못했던 찌릿한 긴장감에 의지와 상관없이 다리가 파르르 떨린다. 1, 2분에 불과하지만 온몸의 신경이 모두 이 울림에 반응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끊기자, 그제야 긴장감도 함께 사라진다. 큰 숨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온다. 몇몇은 찰나의 감동에 벅찬 듯 고개를 숙여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다.

빈 소년 합창단
일요일의 성당 미사지만 다르다. 종교를 믿냐 안 믿냐, 음악을 아냐 모르냐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500년이 넘는 세월 천상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빈 소년 합창단이 본디 노래를 했던 곳에서 듣는 울림이다. 미사 내내 모습을 감춘 채 3층에서 성가를 부른 합창단은 미사가 끝나자 1층에 내려와 제 모습을 보여준다. 합창단은 기다린 이들을 배려해 성가를 한 곡 더 부른 후 회당을 빠져나간다.

호프부르크 왕궁 예배당에서는 일요일 아침 빈 소년 합창단의 ‘천상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 네모 모양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왕궁 예배당 건물.
미사보다는 빈 소년 합창단 때문에 찾는다. 입장료(1만∼4만원대)를 내고 들어야 하는 미사다. 입장료를 내지 않으려면 두 시간을 꼬박 서서 독일어로 진행되는 미사를 들어야 한다. 애초 빈 소년 합창단에 관심이 없었으면 오지 않았을 자리다. ‘천상의 울림’을 들을 준비가 돼 있는 이들만이 일요일 아침 미사를 듣기 위해 호프부르크 왕궁 예배당을 찾는다. 일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오스트리아 빈이라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오스트리아 빈에선 과거의 영화와 어우러진 현대 예술을 확인할 수 있다. 프라터 공원 관람차에서 본 시내 풍경.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들이 있다. 수백년간 이어온 모습을 현재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건축물 등 유형의 전통은 그나마 잘 보존하면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지만, 무형의 전통은 인위적인 노력만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빈은 수백년간 음악, 건축,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단순히 유럽 다른 나라처럼 조상이 일군 흔적을 우려먹는 곳이 아니다. 과거를 토대로 창조적 예술 활동이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빈 여행에선 과거의 영화와 어우러진 현대 예술을 확인할 수 있다.

◆바래지지 않는 과거의 영화

빈 하면 고전 음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현대 예술의 시작이 빈이라고 해도, 빈을 음악의 도시로 만든 이들을 만나는 것이 먼저일 듯싶다. 그들이 없었다면, 현재의 빈을 생각하긴 힘들다.

빈 중앙묘지에는 음악 거장들의 무덤이 모여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모차르트,베토벤, 슈베르트, 요한 스트라우스 2세.
한 시대를 향유한 채 눈을 감은 과거의 음악 천재들은 한곳에서 만날 수 있다. 중앙 묘지다. 250만명 이상이 묻혀 있는 공동 묘지지만, 유명인들의 무덤과 조각품 같은 화려한 비석 등으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중앙문에서 큰 길을 따라 가면 영면을 하는 음악가들이 있는 ‘32A’ 구역 팻말이 눈에 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꽃다발이 가장 많이 놓여 있는 비석을 찾으면 된다. 모차르트 묘 왼편에 베토벤, 오른편에 슈베르트가 잠들어 있다. 모차르트의 묘는 가묘다. 모차르트는 빈의 성 마르크스 묘지에 다른 신원 불명의 주검들과 함께 매장돼 유해를 찾지 못했다. 이들 무덤 뒤편으로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화려한 무덤과 고뇌하는 조각이 있는 브람스 무덤 등이 있다. 그들의 음악 특징이 비석에 투영돼 있는 듯하다.

쇤브른궁은 합스부르크 왕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여름 궁이다. 여제는 프랑스에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궁을 원했고, 로코코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
무형의 전통을 남긴 예술가들의 흔적과 상반된, 유형의 화려한 영광을 보려면 빈 외곽의 쇤브른궁으로 향하면 된다. 쇤브른역에서 내려 10여분 걸어야 하고, 궁과 정원을 둘러보려면 적지 않은 거리를 돌아다녀야 한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1740년부터 1780년까지 40년간 재위한 테레지아 여제는 교회의 특권과 귀족의 병역 특례 폐지, 고문과 농노제 폐지, 의무교육 등을 실시한 계몽 정치가다. 특히 16명의 왕자와 공주를 낳아 유럽 각국의 황실로 출가시키는 정책으로 오스트리아 영토를 폴란드 남부, 스페인, 이탈리아 북부, 옛 유고슬라비아까지 확장했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의 제물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여제의 막내딸이다.

쇤브른궁은 테레지아 여제의 여름 궁이다. 이 궁전은 1713년 레오폴트 1세가 세웠는데, 여제는 프랑스에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궁을 원했고, 로코코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 부드러운 황색 외벽으로 이뤄진 궁전은 3층 건물로 방이 1441개나 된다. 여행객은 이 중 40여개만 들어가 볼 수 있다. 테레지아의 거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 사방이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거울의 방’ 등이 유명하다. 거울의 방은 여섯 살의 모차르트가 여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이다. 나폴레옹에게 빈이 점령당했을 때 쇤브른궁은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글로리에테’는 쇤브른궁과 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궁전 맞은편 지그재그 언덕길에 올라서면 정상의 ‘글로리에테’를 만난다. 프러시아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지은 건축물로 화려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지금은 쇤브룬궁과 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최고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밤이 되면 쇤브른궁의 정원엔 어둠이 깔리지만 건물은 조명으로 낮보다 더 화려함을 자랑한다.

◆현대 예술의 기준을 세우다

파리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처럼 현재의 빈을 대표하는 미술 작품은 벨베데레 궁전의 키스일 것이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가 중 한 명인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다. 클림트가 활동하던 100여년 전 빈은 미술, 문학, 건축, 철학 등 사회 전반에서 변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기존의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예술가 집단에서 탈퇴 후 ‘분리파’라는 새로운 예술가 집단을 결성해 활동한 이들이 바로 클림트를 비롯해 에곤 쉴레, 건축가 오토 바그너, 디자이너이자 공예가 콜로만 모저 등이다. 지금의 빈에서 보고 느낄 수 있는 건축물과 예술 작품 상당수가 바로 이들로부터 태동한 것이다.

당시 건축물과 작품들을 현재의 눈으로 보면 옛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 건축물과 작품 디자인은 당시로는 파격 그 자체였다. 이 옛것들이 발전해 현재의 건축물과 예술 작품으로 진화한 것이다. 분리파는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를 모토로 했다. 100여년 전 과거 체제를 거부하고, 시대에 맞는 예술 세계를 구축한 이들의 흔적이 현재의 빈이다.

벨베데레 궁에 전시된 클림트의 ‘키스’ 앞에서 입맞춤을 하는 커플.
황금빛의 화가, 클림트의 작품은 벨베데레 궁에 가장 많다. 1683년 빈을 침공한 튀르크군을 막은 오이겐의 여름궁전이다. 오스트리아가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뀌며 미술관으로 변했다. 상궁과 하궁, 그 사이의 정원 자체도 매력있지만, 아무래도 세기의 작품들에 가린다. 에로티시즘을 표출한 키스를 비롯해, 관능미의 유디트 등 클림트 대표작 앞은 언제나 붐빈다. 우리만의 ‘인증샷’을 남기겠다는 듯 ‘키스’ 앞에서 서로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커플이 눈에 띈다. 적장을 유혹한 뒤 목을 벤 여성 유디트의 매혹적인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 궁에서 나와 걸어서 20여분 거리의 분리파 전시관에 들어가면 클림트의 역작을 볼 수 있다. 클림트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4악장 중 ‘환희의 송가’ 부분을 해석해 벽화로 표현한 ‘베토벤 프리즈’다. 프리즈란 방이나 건물의 윗부분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장식한 것을 말한다.

클림트 사망 후 빈을 이끄는 예술가로 인정받은 에곤 쉴레의 작품을 보려면 분리파 전시관에서 멀지 않은 레오폴트 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28세의 나이로 단명한 쉴레는 노골적이고 섬뜩한 느낌의 누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오토 바그너 건축물
미술 작품보다 빈에서 여행객의 눈에 가장 많이 띄는 건 오토 바그너의 건축물이다. 철도청에 근무하던 그는 빈의 지하철 ‘U4’, ‘U6’ 라인의 역사들을 설계했고, 다리, 터널, 도로 등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빈 시내를 돌아다니다 녹색의 지하철 역사나 건축물을 본다면 대부분 그의 작품이다.

1683년 빈을 침공한 튀르크군을 막은 오이겐의 여름궁전 벨베데레궁.
클림트와 쉴레, 바그너 등 분리파의 작품이 현재의 빈을 대표하게 된 것은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그들의 사상이 서로 영향을 미쳤기에 가능했다. 그들이 교류했던 장소가 카페다. 대표적인 장소가 분리파 전시관 근처의 ‘카페 뮤지엄’이다. ‘카페 뮤지엄’ 등 빈의 카페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양한 신문과 잡지들이다. 클림트와 쉴레, 바그너 등 분리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카페에서 신문을 통해 세상을 보고, 시대를 논하고, 예술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립해 각자의 작품에 녹여냈고, 현재의 빈을 완성했다. 이런 토대를 이루는 데 중추적인 인물이 클림트와 쉴레, 바그너, 모저인데 이들은 모두 1918년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이들의 서거 100년이 되는 해다. 빈에서는 올해 100여년 전 그들이 어떤 활동을 했고, 현재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다양한 전시회와 행사가 연중 열린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빈(오스트리아)=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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