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이고 ‘대성공’이라고 자평된 북·미 정상회담임에도 북·미 간 비핵화 쟁점을 둘러싼 이견은 여전해 보인다. 리 외무상이 AFR 외무장관 회담에서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다. 리 외무상은 미국에 대해 북·미 공동선언의 단계적 동시 이행을 요구하며, 북한만이 일방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다. 북한은 대북 제재 유지와 종전선언 협상 부진에 불만을 드러냈고, 미국은 국제사회에 대북 제재를 더욱 엄격히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그와 함께 한반도 종전선언과 대북 제재 완화도 주장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로 미루어 볼 때 북한은 실상 비핵화는 별 뜻이 없고 실리를 최대한 챙긴 후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핵 문제를 거론할 태세임이 분명하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하지만 현재까지의 진척 상황은 지극히 실망스럽다. 북한에 대한 체제안전보장안의 내용도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북한은 일관되게 북한이 핵을 개발한 이유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현재로서는 북·미 간에 CVID와 체제안전보장의 맞교환 공식을 찾기가 어떻게 논의되는지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북한이 알맹이 없는 원론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대성공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자화자찬에 근거해 경제 제재를 해제받고, 협상과정을 질질 끌다 파키스탄처럼 사실상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게 되는 경우다. 그렇게 되면 북한은 실리를 챙기는 반면 한국은 여전히 북핵 위협 아래서 살게 될 것이다.
한국은 앞으로 전개될 세 차원의 복합게임 판에서 선의와 균형감을 잘 유지해야 한다. 첫째 차원은 남북한 차원으로, 남북관계 개선, 10·4선언 이행, 철도·도로 연결, 평화체제 등 남북 간에 검토 가능한 이슈가 논의될 것이다. 둘째 차원은 북·미 차원으로, CVID와 ‘불가역적인 체제보장’(CVIG)의 맞교환 공식을 찾는 게 최대의 관건이다. 더 나아가 남·북, 미, 중 등 3자 혹은 4자는 종전선언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셋째 차원은 북한과 국제사회의 관계이다. 여기서는 안보리 제재 해제와 비핵화 검증 및 사찰 문제가 논의돼야 한다.
비핵화 협상과 한반도 평화체제가 성공하려면 세 차원의 진도가 비교적 같은 수준으로 진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알력과 파행이 발생할 수 있다. 이 세 차원의 진도를 맞추는 기준은 실질적인 비핵화 진도이다. 한국이 비핵화 진도보다 남·북관계 개선에 앞서 나가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나리오를 맞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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