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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의 책읽기 세상읽기] (24) ‘밤이 선생이다’ - 말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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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8-16 20:57:56 수정 : 2018-08-16 21: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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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고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2013년에 낸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 서문에서 “문학에 관한 논문이나 문학비평이 아닌 글로는 내가 처음 엮는 책”이라고 했다. 책에 수록된 글 ‘낮에 잃은 것을 밤에 되찾는다’에선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상상력의 시간이다. 낮이 사회적 자아의 세계라면 밤은 창조적 자아의 시간이다”라고 했다. 밤이 선생인 이유일 것이다.

이 책에서 말이나 언어에 대한 성찰이 돋보인다. 언어가 왜 중요한가. “한 집단이 오래 사용해온 언어, 이를테면 모국어는 그 언어 사용자들의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측량할 수 없이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

그는 말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낸다. “우리는 생각을 말로 표현할 뿐만 아니라 말을 통해서 생각한다. 내가 어떤 것을 한국어로 생각해서 그것을 말하거나 글로 쓸 때, 그 생각이 아무리 복잡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과 구조와 깊이는 우리말이 지니고 있는 표현역량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옳은 지적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게다가 말은 정리와 전달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지식을 발견하고 만들어내는 발판이기도 하기에, 결국은 지식과 생각 그 자체라고까지 말할 수도 있다. 생각이 발전하고 지식이 쌓이면 말도 발전한다.”

요즘 말이 혼탁하게 쓰이는 것에 비추어 보면 그 의중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정치권의 허망한 말에 대해 일갈한다. “말과 진실이 맞물리지 않아서, 혼탁한 정치 위에 허망한 말들이 위험한 다리처럼 걸려 있었다. 차라리 말이 진실을 감추고 있었기에 우리가 불행한 세월을 오랫동안 눈감고 견딜 수 있었다고 자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삶을 개혁한다는 것은 말들이 지니고 있는 힘의 질서를 바꾼다는 뜻도 된다. … 그래서 진실을 꿰뚫으면서도 해석의 여지와 반성의 겨를을 누리는 새로운 문체의 개발이 개혁의 성패를 가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함직도 하다.”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그리고 그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일러준다.

말을 가장 정교하게 쓰는 이는 시인일 것이다. 프랑스 현대시를 전공한 불문학자인 그는 시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시인과 시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젊은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일시에 밝게 비춰줄 한 광채의 존재를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서 보았으며, 자신이 그 빛을 본 첫 번째 사람이 아니란 것도 배워서 안다. 그래서 그는 착하고 진실한 삶이 저기 있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비루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날마다 묻게 된다. … 그의 시는 이 모욕 속에서, 이 비루함 속에서 이렇게밖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려던 사람들을 다시 고쳐 생각하게 한다.”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한 사회 풍조에 대한 질타로 이어진다. “삶이 그 내부에서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밖에서 생산된 기호로 그것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가지가지 유행이 밖에서 생산된 바로 그 기호다. 밖에서 기호를 구해 의미의 자리를 메울 때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건 남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눈치를 보는 데 익숙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말도 했다.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것 같은 큰 목소리에서 우리는 소외되어 있지만,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사정으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글쓰기가 독창성과 사실성을 확보한다는 것은 바로 당신의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나의 ‘사소한’ 사정을 말한다는 것이다. … 어디에 좋은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리를 당신의 사소한 사정에 비추어 마련하고 바꾸어가는 문화일 것이다.” 방향을 잃고 파편화된 우리 사회에서 울림이 큰 지적이다.

그러면 어찌 하라는 것인가.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며 마음의 깊은 곳에 그 기억을 간직할 때에만 사물도 그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인다. 그래서 사물에 대한 감수성이란 자아의 내면에서 그 깊이를 끌어내는 능력이며, 그것으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 나와 세상을 함께 길들이려는 관대한 마음이다. 제 깊이를 지니고 세상을 바라볼 수 없는 인간은 세상을 살지 않는 것이나 같다.” 이 산문집에서 가장 엄중한 질책이라고 생각한다.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구절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역사 앞에서 비겁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실을 현실 아닌 것으로 바꾸고, 역사의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눈가림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상상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용감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찾아야 할 것을 찾으려면 위험 앞에서 용감해야 할 것이며, 찾아야 할 것이 위험 속에만 있다면 그 위험이야말로 감동스러운 것이다.”

황현산은 몇 마디 말로 사람들을 반성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는 시에 관한 비평을 모은 책 ‘우물에서 하늘 보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적은 호두 껍데기보다 더 단단해진 우리 마음속에 있으며, 제 비겁함에 낯을 붉히고도 돌아서서 웃는 우리의 나쁜 기억력 속에 있다. 칼보다 말이 더 힘 센 것은 적이 내부에 있을 때 아닌가.” 부지런히 생각하면서 살라는 말로 들린다. 그가 우리에게 남긴 과제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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