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을 경험한 일제는 ‘문화적 지배’를 표방하고, 동화주의를 관철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 지배를 강화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이에 맞서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민족문화론’, ‘민족문화선양론’을 전개했다. 민족문화론과 민족문화선양론은 문화가치를 널리 떨치고 재현하는 것이 문화민족임을 증명하는 일이며, 그렇지 못할 경우 ‘야만민족’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조선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치열한 논리로 맞대응하고자 했다.
보화각 개관 기념 수집가 기념촬영 1938년 보화각(현재의 간송미술관) 개관을 기념해 이상범, 박종화, 고희동, 안종원, 오세창, 전형필, 박종목, 노수현, 이순황(왼쪽부터)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전형필은 우리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어 수집에 나섰던 ‘수호자형 수장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
이와 같은 사회적·문화적 상황 속에서 조선의 미술시장은 활황을 이루어 미술품 경매회가 빈번해졌고, 주요 수장가가 등장했다. 전통 애호와 민족문화의 재발견, 고미술품이 ‘지켜야 할 기호’가 되는 흐름은 이렇게 등장했다.
◆미술품 수집의 중심이 된 중인, 퇴행적 모습도 보여
조선시대의 수장 전통은 개화기 혹은 대한제국기라 불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를 지나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자연스럽게 계승되지 못했다. 수장 전통이 근대로 접어들며 굴절된 원인으로 먼저 일제에 의해 우리의 근대화 과정이 왜곡된 것을 꼽을 수 있다. 이와 함께 전통적 문벌귀족이 몰락한 자리를 채운 중인들의 시대 인식 결여와 신분 상승 지향 때문으로 여겨진다.
서화 감식의 일인자 오세창(1864~1953)은 근대를 대표하는 서예가의 한 사람이자 서화 감식의 일인자로 한국의 수장가들의 미술품 수집, 감정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
그러나 중인들은 근대 서구의 부르주아처럼 변화된 시대를 선도하기보다는 양반 지향적 경향을 보이거나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에 몰입하는 등 퇴행적 모습을 보였다.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가치관의 정립이나 행동방식을 갖추기보다 계층 상승 의식에 매몰된 셈이다.
중인 출신들의 전근대적 행태는 미술품 수장에도 반영되어 그들에게 고미술품 수장 행위는 대체로 전통적 완상이나 민족적 관심의 반영이라기보다 신분 상승의 한 징표에 머문 점도 없지 않을까 싶다.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수장가로 오세창, 박영철, 함석태, 장택상, 김찬영, 이병직, 이한복, 박창훈, 박병래, 손재형, 전형필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 할아버지는 판서, 아버지는 홍문관 교리와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지낸 장택상과 평안북도 가산 군수를 지낸 아버지를 둔 김찬영을 제외하면 근대 미술품 수장가의 신분은 높지 않다. 오세창은 누대에 걸친 역관 집안의 후손이고, 박영철은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미곡상인 아버지 대에 이르면 평민과 다름없었다. 함석태는 평안북도 영변 출신으로 그의 부친 함영택이 성균관 진사 등을 지냈다고 하지만 미화된 것으로 보인다. 박창훈 역시 오세창이 ‘현명한 조카’라 한 구절로 보아 중인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이한복의 집안 역시 중인이다. 강원도 홍천 출신인 이병직은 내시 집안에 입양되었다. 전형필도 현재의 동대문시장인 배오개시장의 상권을 장악한 부친과 소설가 박종화의 고모를 모친으로 둔 중인이었다.
고서화 전시회 알리는 언론사 사고 1940년대 열린 고서화 전시회를 알리는 한 언론사의 사고(社告). 출품자 중에 전형필, 장택상, 김덕영(김찬영), 함석태, 한상억 등 당시의 주요 수장가의 이름이 올라 있다. |
오세창, 박병래, 전형필 등을 제외하면 근대의 수장가들은 조선시대 이래의 미술품 애호 전통 또는 민족적 입장에서 고미술품을 수집했다기보다 1920년대 이후 고미술품 거래 호황이라는 흐름을 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근대 수장가들의 윤곽이 형성되는 시기인 1920∼1930년대, 특히 1930년대는 고미술품 거래가 대단히 활성화된 시기였다. 일본인 수장가는 물론 우리나라의 수장가 역시 다량으로 유통되던 도자, 공예, 회화, 조각 등 다양한 종류의 고미술품을 품목을 가리지 않고 수집하는 경향이 강했다. 특정한 분야에 집중하여 전문적으로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분야를 망라한 것은 그 시절에 고미술품이 쏟아져 나왔고 당시 미술품 수집 양상이 아직 전문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의 수장가들은 특정한 분야에 얽매이기보다 기회가 닿는 좋은 물건은 언제나 가지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수장가들은 수집의 목적, 지향 등을 중심으로 ‘문화재 수호자’, ‘문화재 애호가’, ‘문화재 투자가’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호자는 일제로부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지키겠다는 숭고한 의지가 발현한 이들로 경제적 이해관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수집한 후 끝까지 수장품을 지킨 경우이다. 오세창, 박병래, 전형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애호가는 문화재 수호나 민족의식보다 고미술품에 대한 개인적 애호를 위해서 수장한 경우다. 고미술품에 대한 자신의 안목 등을 주변에 과시하는 데 좀 더 주안을 둔 ‘과시형’과 외부의 시선에 신경 쓰기보다는 자신의 향유와 만족을 위해 수장한 ‘자오형(自娛型)’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과시형으로는 박영철, 장택상, 손재형 등이, 자오형으로는 함석태, 김찬영, 이한복 등이 꼽힌다. 투자가는 미술품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 한 경우다. 1930년대에 다량으로 고미술품을 구입했다가 1940년과 1941년에 들어서면서 모두 경매회에서 매각한 박창훈이 대표적이다. 이병직 역시 1937년, 1941년, 1950년 세 차례의 경매회를 통해 자신의 소장품 대부분을 처리했다. 일본군의 고위 장교, 고위 관료, 굴지의 기업인으로 활동한 박영철은 주요 수장품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여 자신의 친일 행각을 희석시켰다는 점에서 문화재 투자가적 면모를 보인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
수장가들의 수장활동과 수장품의 의미 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구체적인 삶과 지향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수장가들의 미술품 수집, 관리, 처분은 물론 각자의 일생과 세계관을 입체적 시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작업은 한 개인의 생애 또는 이력을 들여다보는 것을 넘어 근대 시기 수장의 풍경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필요하다. 현대 미술시장의 원형이 성립되고, 전통미술 인식 체계가 근대에 접어들며 형성되어 지금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업은 중요성을 갖는다.
김상엽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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