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출간된 이래 최장수 경제 분야 베스트셀러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일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이 책이 출간된 해는 월급쟁이들에게 엄혹한 시절이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맞아 한국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수십만명의 실업자가 양산됐다. 기업들은 평생 직장으로 알고 헌신해온 근로자들을 더 이상 지켜줄 수 없었다. 대규모 감원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때 “안정되고 좋은 직장을 구하는 게 부자 되는 정답이 아니다” “자신만의 일을 찾고 좋은 투자대상을 찾아야만 가난을 피할 수 있다”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메시지가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실직했거나 실직 위기에 놓인 월급쟁이들의 두려움을 잠재우는 ‘희망의 전언’이 된 셈이다.
16일 교보문고의 베스트셀러 집계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18년까지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은 경제·경영 베스트셀러는 ‘시크릿’ ‘마시멜로 이야기’ ‘설득의 심리학’ ‘넛지’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스티브잡스’ ‘배려’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순으로 나타났다.
이 시대는 미국을 중심으로 정부의 시장개입에 반대하고 시장 자율성을 옹호하는 신자유주의가 힘을 얻었던 시절이었다. 소득·분배 양극화는 신자유주의 부산물이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를 계기로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세계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경쟁력을 상실한 부문은 속절없이 도태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사회안전망이 부실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심했다. 시장의 소득분배 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수치인 지니계수(0∼1 구간에서 움직이며 0은 완전평등, 1은 완전불평등한 상태다)가 2001년 0.29에서 2009년 0.32까지 치솟으면서 기존의 경제성장 모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동반성장과 분배 문제를 지적하는 도서들이 돌풍을 일으켰던 셈이다.
세계화로 우리나라 근로자들이 전 세계 근로자와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자 출판시장에는 자기계발서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간절히 원하면 성공과 부를 쟁취할 수 있다”는 조언을 담은 자기계발서들이 독자들을 유혹했다.
지난 20년간 정권의 변동, 증시와 부동산 등락, 주력산업의 변동 등에 따라 시민들이 열독한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들은 민감하게 변동했다. 분배 문제의 해결과 복지 강화를 내세운 이른바 ‘진보정권’에서는 역설적으로 재벌총수의 일대기와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설명한 도서들이 인기를 끌었다. 반면 ‘성장’을 내세우며 감세와 규제 완화에 박차를 가했던 보수정권에서는 진보적 경제학자로 꼽히는 장하준 케임브리지대 교수 등의 저서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점령했다. 스마트폰이 대중화하고 모바일혁명이 가속화하기 시작하던 2010년 무렵부터는 미래 트렌드를 예측하는 도서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소장은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고 대비책을 세우기 위해 도서를 읽는 경향이 있다”며 “정권별 정책 지향점이 급변하면 반작용의 원리로 반대되는 도서들이 인기를 끌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진보정부에선 재테크, 보수정부에선 분배 관련 서적 인기
교보문고 집계에 따르면 1998년부터 연간 경제·경영 분야 상위권을 독식하며 각종 재테크 및 성공·처세술을 전파하던 도서들이 베스트셀러 선두권에서 일부 밀려난 것은 2008년이었다. 가장 많이 읽힌 도서로 집계된 것은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이 저서는 무분별한 시장주의가 지나친 불평등과 경제 불안을 가져와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위협하기 때문에 시장을 적절히 규제하고 복지국가 등 사회 통합적 정책을 펴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청년실업률이 상승하고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지면서 ‘세대 간 경쟁’에 주목한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40대와 50대는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운 20년을 향유했지만 그런 안정된 경제활동의 기회가 지금의 20대들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을 것이고 10% 미만의 선택된 소수만이 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암울한 현실을 직시한 도서다. 현재 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는 채모(35·여)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방송사 PD만을 꿈꾸며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언론고시 준비반에서 장기간 준비하고 있었는데,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수익이 악화돼 아예 공채를 하지 않는 방송국들이 대다수였다”며 “결국 이듬해 외주제작 업체에서 조연출 일을 했지만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결국 꿈을 접고 돈을 택했다”고 말했다.
지난 20년간 세대별 누적 베스트셀러를 분석해 본 결과 20대부터 50대까지 베스트셀러 상위 20위권 안에 공통적으로 이름을 올린 도서가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였다.
역설적으로 양극화 해소를 기치로 내세웠던 노무현정부에서는 기업이나 돈과 관련된 책들이 인기를 끌었다. ‘한국의 부자들’ ‘한국형 땅 부자들’ ‘이건희’ ‘이건희 개혁 10년’ ‘이병철 경영대전’ ‘삼성처럼 회의하라’ ‘이병철 vs 정주영’ ‘잭 웰치 끝없는 도전과 용기’ ‘케네디 리더십’ 등이 대표적이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당시 조세부담률이 큰 폭으로 높아졌고 2002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가 2002년 17.6%에서 2007년 28.7%까지 증가했다”며 “경기 침체 늪에 빠진 정부가 씀씀이를 늘리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공한 CEO들의 경영철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풀이된다”고 말했다.
◆변화 속도 빨라진 최근 10년, 미래 트렌드 전망 책 인기
최근 10년 동안은 미래 트렌드를 전망하는 책들이 출판 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한국에서 스마트폰 보급이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2009년부터 ‘유엔미래보고서: 미리 가본 2018년’ ‘마켓3.0’ ‘100년 후’ ‘2020 부의 전쟁 IN ASIA’(2010년)‘트렌드코리아2012’(8위) ‘유엔미래보고서2030’(5위) ‘2030 대담한 미래’(9위) ‘새로운 디지털 시대’(12) 등이 상위권으로 올랐다. 대기업에서 마케팅 일을 하고 있는 이수윤(30·여)씨는 “당시 스터디를 하면 꼭 미래 트렌드 키워드를 제시하는 책을 같이 보면서 면접을 준비했다”면서 “사회가 그만큼 빨리 바뀌기 때문에 다양한 경험과 주변에 대한 세심한 관찰을 통한 미래 예측 능력이 잠재력 높은 인재를 평가하는 지표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교보문고 조사에 따르면 미래 트렌드 도서의 주 독자는 4050세대였다. 지난 20년간 50대가 가장 많이 구입한 경제 도서는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미래 이슈를 다룬 ‘명견만리’ 시리즈도 10위권 안에 들었다. ‘연도별 트렌드코리아’ 도서가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가 하면, ‘플랫폼 레볼루션’ ‘블록체인 혁명’ ‘10년 후 미래’를 비롯한 미래 전망 도서들도 인기를 끌었다. 은행에서 지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정모(51)씨는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려면 일단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현안을 꼭 챙겨보고 있다”고 말했다.
◆재테크 서적, 정책 따라 주식→ 부동산으로 이동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즐겨 읽는 재테크 책의 주제도 급변해 왔다. 2000년대 초반 IT(정보기술) 버블이 터지기 직전까지는 주식 투자 관련 책이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자리를 도맡아왔다. 1999년 경제경영 분야 베스트셀러 20위권 안에는 ‘증권투자 알고 합시다’ 주식 살 때와 팔 때’ ‘나는 1억으로 석달 만에 17억을 벌었다’ ‘주식혁명보고서’ ‘증권투자 길라잡이’가 포함됐다. 그러다 2003년 들어 노무현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이 역효과를 내면서 부동산이 급등하기 시작하자 부동산 투자 관련 책들이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한국형 땅 부자들’ ‘집 없어도 땅은 사라’ ‘부동산으로 10억 만들기’ ‘부동산 노테크’ ‘오르는 부동산을 사들이는 100가지 방법’ ‘돈 되는 땅 따로 있다’ ‘다부자씨는 부동산으로 30억을 만들었다’ 등이 대표적인 부동산 재테크 도서 목록이다.
부동산 경기 부양에 나섰던 박근혜정부에서도 ‘갭투자’ ‘임대수익’ ‘빌딩투자’를 키워드로 한 부동산 도서들이 잘 팔렸다.
문재인정부 들어서는 가처분소득이 정체 국면에 이른 데다 불황이 심화하고 1인가구가 증가하면서 많이 벌기보다는 적은 돈을 벌더라도 아껴 쓰자는 취지의 ‘짠테크’ 서적들이 독자의 이목을 사로잡고 있다. ‘1인가구 돈관리’ ‘적게 벌어도 잘 사는 여자의 습관’이 대표적이다. 이 책에서는 다른 친구들이 멋을 내고 연애를 하느라 돈을 쓸 때 미래를 위해 저축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확천금을 노리기보다 소확행을 추구하는 성향이 투자에도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라윤 기자 ryk@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