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대중가요의 한 구절처럼 무슨 일을 해도 잘될 것 같은 자신감이 충만한 때가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과거형이 된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예전에 말이야…”라며 구닥다리 레퍼토리를 읊는 처지가 된다. 아니면 갈수록 세월에 뒤처진다는 생각에 낙담하게 된다. 세월의 흐름을 어찌 거스르겠는가라며 자책을 하지만, 연륜과 경험에 걸맞은 매력이 분명 누구에게나 있다.
비단 사람만의 얘기가 아니다. 도시도 다르지 않다. 한때 잘나가던 도시가 어느새 노쇠한 지역이 됐다. 예전에야 잘나가던 지역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시간이 흐르자 지금은 옛 흔적만 남은 도시로 치부됐다. 당시 기준으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 건물들이 즐비했지만, 어느새 흉물로 인식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흉물이었던 이 건물들이 세월이 흘러 다시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당연히 없어져야 할 것으로 여겨졌던 건물들이 시간이 흐르자 이젠 과거의 영화를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다른 지역에선 아파트 등 신식 건물이 들어서며 흔적이 사라졌지만, 개발에서 밀리자 남아있는 옛 건축물들이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됐다. 지역의 흉물에서 보물로서 조금씩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원석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목포엔 나무를 이용해 지은 일본식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적산가옥 등 과거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
부산, 원산, 인천에 이어 네 번째로 개항한 항구가 전남 목포다. 1897년 개항 후 항구도시로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일제강점기 때 목포는 전국 6대 도시에 꼽힐 정도로 대도시였다. ‘개가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당시 번화했던 유달산 동남쪽 도심은 7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때의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유지라기보다 방치됐다는 것이 더 정확할 듯싶다. 더구나 목포와 붙어있는 무안 남악신도시에 전라남도청이 들어서며 옛 도심인 만호동과 유달동은 사람이 떠나 더더욱 생기를 잃었다.
사람이 떠났지만, 과거 모습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근대 건축물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북 군산 등 근대 건축물로 여행객의 흥미를 끄는 지역이 있지만, 목포 만호동과 유달동 일대엔 당시 건축물들이 영화 세트장을 재현해 놓은 것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차로 이동할 필요도 없다. 현재 목포근대역사1관으로 사용되는 ‘구 목포 일본영사관’ 남쪽으로 격자형 도로가 조성돼 있다. ‘1897 개항문화거리’로 불리는 도로를 따라 사방으로 연결된 길을 둘러보면 된다.
영사관은 목포에 있는 근대 건축물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오래됐다. 유달산 노적봉을 오르는 언덕에 있어 바다 쪽으로 일본인이 거주하던 조계지(외국인이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와 항구를 내려다볼 수 있다. 1900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해방 후엔 목포시청으로 사용되다 도서관, 문화원 등을 거쳐 목포근대역사1관으로 변모했다. 건물 뒤편으로는 일제가 파놓은 방공호가 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
목포 화신백화점은 과거 가장 유명한 상업시설이었지만, 지금은 휑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
모든 건축물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화신백화점과 쌍벽을 이뤘던 ‘구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은 예술협동조합 ‘나무숲’이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시 공간 뒤편으로 나가면 나무를 이용해 지은 일본식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는 적산가옥이 있다. 화신백화점이 일제 자본으로 세워졌다면, 동아부인상회 목포지점은 조선 부녀자들이 조합을 결성해 설립한 곳이다.
일제강점기 요정이었다가 여관으로 사용된 창성장은 지난 8월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했다.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 인근의 아기자기한 카페 ‘행복이 가득한 집’은 구 목포부립병원 관사로 사용된 곳이다.
일본인이 거주하던 계획도시 오른편으로 난 고개를 넘으면 온금동이다. 이 고개는 아리랑고개로 불린다. 고개 너머 가난하게 살던 한인 거주지역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언덕 위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지붕들을 보면 언덕 아래 격자형 도로를 따라 일정하게 건물들이 배치돼 있는 일본인 거주지역과 비교가 된다.
이곳에 철골 구조물만 남은 낡은 공장 건물이 있다. 1997년 문을 닫은 조선내화 목포공장이다. 1930년대부터 용광로 내부에 들어가는 내화벽돌 등을 굽던 공장이다. 한때 직원이 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다. 공장이 커지자 뒤편 산동네에 마을이 생겼다. 비가 들이치는 것을 막기 위해 철골 구조물 위로 파란 비닐을 덮었는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장 한가운데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오래된 벽돌 소성 기계만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화 촬영 장소로 문의도 있었지만, 안전 문제로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전남 목포 조선내화 공장은 용광로 내부에 들어가는 내화벽돌 등을 굽던 공장으로 1997년 문을 닫았다. 철골 구조물 위를 파란 비닐로 덮어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선내화는 이곳에 카페, 갤러리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
벽돌을 구워내던 1960년대식 터널가마. |
조선내화 공장 한가운데에는 오래된 기계만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철골 구조물만 남은 낡은 조선내화 공장 건물. |
목포 원도심에서 올려다 본 유달산 전경. |
근대 거리의 격자형 도로의 모습과 항구 목포의 모습을 명확히 보려면 유달산 노적봉으로 향하면 된다. 노적봉 앞까진 자동차로 갈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유달산 서쪽 봉우리를 이엉으로 덮어 군량미처럼 보이게 했는데, 이를 보고 왜군이 군량이 많아 군사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도망쳤다는 얘기에서 노적봉 이름이 유래했다. 일제강점기 때 ‘왜군 도주설’을 희석시키려 일제는 노적봉을 노인봉, 노인암으로 표기했다고 한다.
노적봉부터 유달산 정상 일등바위까지는 1시간이면 도착한다. 유달산은 해발 228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고래바위, 얼굴바위, 종바위 등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영혼이 봉우리를 거쳐 간다는 전설이 있어 영달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오르는 길에 가장 먼저 맞는 것은 일제에 대한 저항을 노래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비다. 가사 중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임자취 완연하다’란 부분이 있는데, 1935년 노래가 나왔을 땐 일제의 검열을 피하려 딱히 의미 없는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으로 노랫말을 바꿔 불렀다. 해방 후 원 가사를 되찾았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 |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있는 유달산의 얼굴바위. |
유달산 일등바위에 오르면 목포대교와 그 너머 다도해 풍광이 펼쳐진다. |
유달산엔 일본인이 숭상하는 홍법대사와 부동명왕 조각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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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무렵 유달산을 찾으면 목포 원도심과 항구의 야경을 담을 수 있다. 아파트 등 건축물로 어두운 곳을 찾기 힘든 신시가지와 달리 원도심은 가로등을 빼곤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
목포=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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