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난해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 들어간 B(17)군은 3월 입학식 때부터 학교생활이 꼬였다. 행사가 끝나고 용변이 급해 찾은 화장실에는 친구 2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신경 쓸 여력이 없던 B군이 일을 마치고 나오던 차에 선생님도 화장실로 들어왔다. B군은 졸지에 교사들에게 ‘담배 피우는 애’가 됐다. B군은 이날부터 교사들을 피해 다니고 학교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해명만 하면 쉽게 풀릴 일이었지만 그를 도와줄 상담교사는 이 학교에 없었다.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정신건강에 여전히 적신호가 켜져 있다. 성적과 가정 문제 등 각종 고민을 풀어낼 상담창구가 협소한 탓이다. 교육부의 학생상담 정책인 위(Wee) 프로젝트가 시행 11년째를 맞았지만 상담인력 확충은 제자리걸음이다. 부적응 학생을 조기 발견해 학교폭력과 왕따 등을 예방한다는 목적과 달리 상담교사는 과중한 업무에 짓눌려 있고 학생들은 상담을 못 하거나 한다고 해도 오랜 시간을 기다리기 일쑤다. 정부가 위 프로젝트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0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3세에서 18세 사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청소년의 94.7%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했다.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성적이나 적성 등 공부에 관한 문제(47.3%)였고 외모(13.1%)와 직업(12.3)이 뒤를 이었다. 용돈부족(5.8%)이나 이성교제(1.4%) 문제를 호소하는 청소년도 있었다. 경쟁을 강조하는 한국사회에서 청소년 중 절반은 학업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대부분의 청소년이 저마다의 말 못 할 고민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이 고민을 털어놓을 곳은 너무나도 좁다. 대부분 친구나 가족들에게 털어놓는 게 전부다. 고민을 듣고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내놓을 전문상담가에게 상담을 요청하는 청소년은 희박하다. 이는 지난해 청소년 중 전문상담가가 고민 풀이의 대상이 됐다고 응답한 인원이 0.7%에 그쳤다는 설문에서 드러난다. 청소년의 44.1%는 주된 고민상담 대상으로 친구를 꼽았고 28.9%는 어머니를 뽑았다. 고민을 스스로 해결한다는 응답도 13.7%에 달했다.
청소년들이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과도한 스트레스를 느끼고 있지만 학교 현장의 상담인력 배치는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4월 기준 전국의 상담교사는 2906명이다. 전국에 총 1만1736개 학교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배치율이 24.3%에 지나지 않는다. 학교 10곳 중 8곳에는 상담교사가 없다는 얘기다. 모든 공립 중학교에 상담교사를 1명씩 배치한 일본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수치다. 현실이 이러니 한 상담교사가 여러 곳에 순회 상담을 나가기도 하고 일부 학교에서는 전문성이 없는 일반 교과 교사에게 상담교사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학교 밖 상담사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것은 아니다. 국가자격증인 청소년 상담사 자격 취득자는 지난해 2411명, 2017년 2724명이 배출되는 등 2014년부터 매년 2000여명의 전문 청소년 상담사들이 탄생하고 있다. 반면, 2003년부터 2016년 상반기까지 배출된 청소년 상담사 1만1774명 중 취업이 확인된 상담사는 4853명(42.8%)에 지나지 않는다. 청소년 상담사들은 가정지원센터, 복지시설, NGO 단체 등 학교가 아닌 단체에 소속되기도 쉽지 않다. 국가가 자격증을 운영하면서 자격증 취득자에 대한 처우는 나몰라라 하는 셈이다.
상담교사 부족으로 일선 학교에서 고안한 게 ‘또래상담’이다. 또래상담은 일반 학생이 또래 청소년들에게 고민을 들어주면서 서로 문제를 해결하고 조언을 주는 형태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고민을 주로 친구들에게 털어놓고 가장 쉽게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상이 또래인 것이 감안됐다. 또래상담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야 하지만 여력이 안 되는 학교 현장에서는 가위바위보나 뽑기 등으로 또래상담사를 뽑는 일도 많다. 이러다 보니 고민 상담 내용이 친구들에게 퍼지거나 상담하는 중에 서로 싸움이 나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또래상담은 보조적인 상담 창구가 돼야 한다며 전문 상담교사 확충이 무엇보다 우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용련 한국외대 교수(교육학)는 “인력이 없으니 교육청 단위로 위센터를 둬 현장과 동떨어지게 된다”며 “현재의 상담 시스템은 일이 터졌을 때 사후처리하는 데 급급할 뿐 사전 예방 등 적극성을 띨 수 없다”고 꼬집었다. 정익중 이화여대 교수(사회복지학)도 “학교 현장에서 1차적 상담으로 청소년들을 바른길로 이끌어야지 학교를 벗어나게 두면 안 된다”며 “현실적인 이유로 일반 교과 교사가 상담교사 역할을 하더라도 수업을 면제해주는 조치 등이 있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김청윤 기자 pro-ver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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