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교육기관에 근무하는 A(42)씨는 매달 마지막 주가 되면 하루는 원하지 않는 야근을 해야 한다. A씨가 2시간 야근을 피할 수 없는 이유는 매달 ‘문화가 있는 날’인 마지막 수요일에 2시간 일찍 퇴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체부 산하기관에서 일하는 B(30)씨도 문화가 있는 날 조기퇴근이 부담스럽다. 외국어 학원 저녁반을 다니는 B씨는 학원을 빠지지 않기 위해 야근 대신 오전 7시 출근을 선택했다. B씨는 “조기퇴근을 빠지려면 사유를 보고하고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며 “상사나 동료직원 눈치가 보여 억지로 참여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12일 문체부와 산하기관을 취재한 결과 문체부는 2016년부터 문화가 있는 날 2시간 조기퇴근제를 실시하고 있다. 공무원들은 해당 날짜에 일찍 귀가해야 하고 부족한 주당 근로 시간은 다른 방식으로 채워야 한다. 직원들 사이에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긍정적 취지가 반영된 반응보다는 강제적인 근무제를 3년여간 지속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는 이유다.
문체부는 2009년 업무의 생산성과 직원 개인의 근무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유연근무제를 도입했다. 문체부 유연근무제 운영규정 제2조와 제5조에는 유연근무제를 ‘희망하는’ 직원들이 출퇴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명기해 놨다. 제도 도입 이후 문체부는 내부 직원들에게 매달 문화가 있는 날 조기퇴근제를 독려하는 지시 메일을 보내고 있다. 문체부 본부 54개 과와 18개 소속기관 전 직원이 대상이다. 문체부가 보낸 메일에는 직원들이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4시 퇴근 및 40시간 근무를 준수하기 위해 주중에 출근 또는 퇴근 시간을 조정해야 한다는 점이 명시됐다.
당초 제도 도입 목적은 평일 오후 공연장이나 박물관에 방문해 문화를 향유하도록 독려하는 것이었으나 이마저도 본래 취지와는 다른 엉뚱한 결과를 낳고 있다. 조기퇴근 시 업무나 민원 전화를 받을 수 있게 내선 전화를 개인 휴대전화로 착신전환하도록 정해놓은 탓이다. 문체부 공무원들은 문화가 있는 날 오후 4시에 몸만 직장을 떠난 채 전화로 외부에서 계속 일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야근이나 조기출근에 따른 부담은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니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문체부가 유연근무제 시행 성과를 높이기 위해 문화가 있는 날 조기퇴근제를 운영하고 있다는 의심도 나온다.
인사혁신처는 매년 각 부처의 유연근무제 실시 현황을 조사하고 부처 평가에 반영하고 있다. 인사혁신처에 따르면 문체부는 2016년 직원 유연근무제 이용 비율 83%를 기록하는 등 최근까지도 80% 내외를 달성해 우수한 성적을 내고 있다. 문체부 관계자는 “유연근무제를 강제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며 “문화 향유라는 좋은 목적으로 시행하는 제도로 생각해달라”고 해명했다.
전문가들은 문체부가 유연근무제의 운용 목적을 되돌아보고 제도를 정비할 것을 주문했다. 류석춘 연세대 교수(사회학)는 “제도 이름만 유연근무제지 비유연하고 탄력성 없이 운영되고 있는 것”이라며 “관의 입장만 대변하는 전형적인 관치행정”이라고 꼬집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도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데 일방적 정책으로 획일적으로 유연근무제를 강요하는 것은 본래 취지와 맞지 않는다”며 “문체부가 직원들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청윤·이종민 기자 pro-ver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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