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왕위를 계승한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지난 22일 공식 의식을 열고 즉위 사실을 대내외에 알렸다. 새 일왕은 “국민의 행복과 세계평화를 항상 바라며 국민에게 다가서면서 헌법에 따라 일본과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 임무를 다할 것을 맹세한다”고 했다. 새 일왕은 일본 정치에서는 국정에는 관여하지 않는 상징적 존재이지만 사회통합의 최상위 구심점 역할을 한다. 레이와(令和·새 연호) 시대 한·일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새 일왕의 메시지는 헌법 개정을 통해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보통국가로 바꾸려는 아베 신조 총리의 우경화 행보와 확연히 대비된다. 사회통합의 상징으로서 일왕의 발언이 갖는 상징성이 크기 때문에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현실정치와는 별개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큰 이유다. 한국에서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즉위식에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새 일왕과 아베 총리에게 전달했다. 레이와 시대 개막은 그동안 악화일로를 면하지 못하던 한·일관계를 개선할 긍정적 계기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
문제는 아베 총리와 문 대통령이 진정으로 한·일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지 여부다. 이 총리의 아베 총리 면담은 당초 10분 정도로 예상됐던 시간을 넘겨 21분간 진행됐다. 이 총리는 “양국 현안이 조기해결되도록 노력하자”는 취지를 담은 문 대통령의 친서를 아베 총리에게 전달하고, 한·일관계 복원을 위한 여러 방안을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짧은 만남은 한·일 간 세 가지 핵심 의제인 강제징용, 수출규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문제를 풀기엔 역부족이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양국이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후속 협의를 전개해 나갈지가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문 대통령이 조만간 아베 총리와 정상회담을 개최해 톱다운 방식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다음 달 태국에서 열리는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칠레에서 개최되는 에이펙(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등 다자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만나는 길도 열려 있다.
한·일관계 개선은 한·일 지소미아 종료 결정으로 파국을 향해 가던 양국관계를 정상화하는 길이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한국의 의도에 의구심을 보이던 미국에도 긍정적인 시그널로 읽힐 것이라는 점이다. 비록 트럼프 시대 들어 약화되긴 했지만 미국은 냉전 이후 일관되게 동맹과 우방국을 네트워크로 엮어 자유주의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치·인권·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시장경제 등 소위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지소미아 파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한·일관계의 악화는 미국을 포함한 동맹국 간의 네트워크를 약화시키는 것이지만 미국이 한·일 중 어느 한 편을 두둔하기 어렵기 때문에 적극적 중재 역할에 신중한 자세를 보여왔다. 지금도 미국은 한·일 양국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양보를 통해 접점을 찾기를 희망하고 있다.
더 나아가 한·일관계 개선은 미국과 일본이 적극 추진하는 인도·태평양전략에 한국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이다. 갈수록 거칠어지는 미·중 전략경쟁 가운데 강대국이 앞장서서 규범이나 가치보다는 이익과 실리 위주의 대외정책을 추구함에 따라 세계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시대가 현 국제질서의 특징이다. 자국 이익 중심의 공세적 대외정책, 글로벌 구심점의 약화, 그 반작용으로 세계 도처에서 권위주의 리더십과 비자유주의적 국제질서가 만연한 속에서 한국은 누구와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레이와 시대 개막을 계기로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진정성을 갖고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만일 한·일 모두 미국의 입장을 고려해 마지못해 대화 자리에 마주 앉지만 각자 국내정치적 이익만 계산한다면 한·일관계의 앞날은 여전히 암울하다. 11월 23일 0시에 지소미아 폐기가 발효할 때까지 아직 협의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한·일 양국은 최대한 창의성을 발휘해 강제징용, 수출규제, 지소미아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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