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자유한국당 내에서 지도부 용퇴론과 중진들을 향한 불출마 요구가 재분출하고 있다. 개혁 성향의 40대 3선 김세연 의원이 전날 21대 총선 불출마 선언을 통해 인적 쇄신의 깃발을 들어올리자, 당 안팎에서 “당 지도부부터 기득권을 포기하고 쇄신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하지만, 황교안 대표와 당 지도부, 중진 의원들은 여전히 ‘총선 불출마’나 ‘험지 출마’ 등에 대한 명확한 입장표명을 피하는 모양새다. 영남권 의원들 중심으로는 김 의원에 대한 비판 목소리도 분출되고 있다.
◆한국당 내 “지도부 ‘험지 출마’ 등 솔선수범해야”
황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이번 총선에서도 우리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면 저부터 책임지고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이는 지도부를 향해 제기되는 용퇴론을 사실상 거부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오히려 황 대표는 “현재의 위기상황 극복을 논의하기 위한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의한다”며 대여 공세의 고삐를 죄었다. 용퇴론을 정면돌파하기 위한 국면전환 카드로 ‘영수 회담’을 꺼내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관계자는 “황교안 대표의 영수회담 제안은 공식적으로 사전에도 사후에도 전달받은 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다음달 임기가 종료되는 나경원 원내대표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사퇴를 포함한 당의 전면 쇄신을 촉구한 김 의원의 요구에 “(패스트트랙 저지) 역사적 책무를 다한다면 어떤 것에도 연연해하는 것은 없다”고 밝혔다. 사실상 임기를 마무리하겠다는 의사로 풀이된다.
김세연 의원은 이날도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황 대표와 나 원내대표를 향해 “두 분이 당 차원의 큰 결단에 앞장서 주시면 좋겠다는 바람”이라며 이들의 불출마를 재차 촉구했다.
당 지도부도 별다른 후속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날 최고위 공개 모두발언에서 원외인 정미경 최고위원과 청년 최고위원인 비례대표 신보라 의원만이 인적쇄신 필요성을 언급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수도권과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지도부가 너무 안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수도권의 한 의원은 “황 대표가 김 의원의 불출마 선언문에 대해 조금이라도 화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험지 출마 선언이라도 했어야 했다”며 “오늘 발언은 매우 실망스러운 수준”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의원은 “총선에서 참패하면 당 대표에서 물러나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황 대표가 당연한 얘기를 뭔가 자기가 기득권을 내려놓는 듯이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영남권 중진들, “김세연 과격한 주장”
인적쇄신 대상으로 거론되는 영남권 중진 의원들은 대부분 공개적인 입장표명은 내놓지 않으면서도 술렁대고 있다. 김 의원의 ‘충정’은 이해한다면서도 그가 주장한 의원 총사퇴나 불출마 요구에는 “현실성과 대안이 없는 과격한 주장”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한 영남권 의원은 “김 의원이 한 일은 함께 먹던 우물에 침을 뱉은 것”이라며 “정말 힘들게 당을 되살렸는데 ‘좀비’ 이야기를 하며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자존심이 상했다”고 비판했다.
다른 영남 지역 의원도 “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결국 바른미래당 유승민 의원이 한 ‘헌 집 헐고 새집 짓자’는 것과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라며 “자기가 몸담은 정당을 해체하라면서 원장직을 유지할 수 있겠냐. 황교안 대표가 경질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대구 4선인 주호영 의원은 CBS 라디오에 출연해 “20대 공천에서 ‘친박’이네 ‘진박’이네 하던 상황과 그 이후 탄핵 직전 상황 등을 보며 자괴감을 느꼈던 의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며 “그 이후 자당 출신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구속된 뒤 3년 연속 큰 선거에서 대패했지만 자정·혁신운동이 없었다. 앞으로 불출마 선언은 더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 물은 안 빠지고… 인적쇄신 ‘주객전도’ 논란
정치권에 물갈이 바람의 모태가 된 ‘세대교체론’이 등장한 건 1963년 민주공화당 내 노(老)·소(小)장 간 대립이 불거지면서였다. 당직을 둘러싸고 젊은 의원들이 다선 의원들에게 반기를 들면서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다. 이후 지역 텃밭에 기대 당의 공천에만 혈안이 된 구시대 정치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중진 물갈이론’이 선거 때마다 휘몰아쳤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의원의 불출마 선언이 이어지며 중진 용퇴론이 각 당에서 피어오르고 있다. 하지만 국회에 갓 입성한 초선이나 유망 정치인 위주로 불출마 선언이 나오면서 주객이 전도됐다는 비판과 함께 논란이 확산되는 모양새다.
진영논리에 묻혀 정의와 상식보다는 당리당략에 치우쳐 ‘동물국회’, ‘식물국회’를 만든 정치인들은 그대로 남아 있고, 이런 문화에 혐오를 느낀 괜찮은 정치인들만 떠나는 모양새가 이어지면 국민들의 정치 혐오는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번 20대 국회는 최악의 일 안 하는 국회라는 평가가 나오지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는 의원은 극히 소수다. 민주당의 이철희·표창원 의원과 한국당 김세연 의원 등 의정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소속 정당뿐 아니라 상대 당에서도 인정을 받는 의원들 위주로 불출마 선언이 나오고 있다.
이들은 개선되지 않는 현실 정치에 대한 한계와 무력감 등을 공통으로 지적했다. 김 의원은 지난 17일 불출마 선언문에서 “저는 정치권에서 ‘만성화’를 넘어 이미 ‘화석화’되어 버린 정파 간의 극단적인 대립 구조 속에 있으면서 ‘실망-좌절-혐오-경멸’로 이어지는 정치 혐오증에 끊임없이 시달려왔다”며 현 정치권을 비판했다. 이 의원은 “정치가 해답(solution)을 주기는커녕 문제(problem)가 돼버렸다”며 “정치인이 되레 정치를 죽이고, 정치 이슈를 사법으로 끌고 가 그 무능의 알리바이로 삼고 있다”고 불출마 이유를 밝혔다. 표 의원도 불출마 선언문에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국회가 정쟁에 매몰돼 민생을 외면하고 본분을 망각했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들에 이어 최소한 ‘염치’를 아는 의원들의 불출마가 이어질 경우 국회를 바꿔야 할 사람들은 떠나고, 바뀌어야 할 사람은 그대로 남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정치학)는 “기득권에 오래 안주했던 사람들, 정치권의 현재 대립 구도 완화에 도움되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입지만 다졌던 사람들, 특정 지역에서 계속 기득권 카르텔을 확장해온 사람들이 나가야 할 사람으로 볼 수 있다”며 “그 사람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정치적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양대 진영정치와 기득권 정치를 강화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각 당이 처한 상황 역시 책임 있는 중진 의원들의 자리 보존을 강화하는 모양새다.
지역구 정치에 매몰된 구시대 정치인을 끌어내야 한다는 지적이 민주당에서 나오지만 ‘시스템 공천’을 표방하며 일찌감치 체제 정비를 한 만큼 인위적인 ‘물갈이’는 쉽지 않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현역 의원평가 하위 20%에 들어 표 감산을 당하더라도 경선과 본선에서 이기면 된다”며 “‘또 나왔다’는 불명예도 시간이 지나면 잊힐 텐데 본인의 큰 결심 없이 물러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말했다.
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선거에서 패했지만, 내부적인 자정과 혁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황교안 대표 체제에서 과거 탄핵에 책임 있는 인사들이 중용되는 등 자정에 대한 얘기는 쏙 들어갔다. 한국당의 수도권 원외 당협위원장은 “기본적으로는 우리 내부에서 탄핵을 둘러싸고 잘했다 못했다는 다툼이 있고, 거기서부터 분란이 시작되고 있다”며 “탄핵 찬반 두 세력 모두 사과하고 반성하고 화해해서 통합으로 나가야 하는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불출마 선언을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의 불출마 선언은 정치권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이라며 “결국 유권자가 평가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장혜진·곽은산·이현미·이귀전·이창훈 기자 jangh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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