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겨울, 파리로의 시간 여행
이제 정말 겨울이 온 것 같다. 얼마 전 온종일 내리는 눈을 보니 그런 확신이 들었다. 눈은 겨울이 왔음을 인정하게 하는 지표 역할을 한다. 서울에서 첫눈을 관측한 것은 지난달 15일이었다. 기상청이 기록하는 첫눈은 자체적인 측정 기준을 따른다. 종로구 송월동에 위치한 서울기상관측소에서 관측한 눈이 공식적인 첫눈이 된다. 그다음 날 주위 몇몇 사람이 첫눈에 관한 글을 썼다. 하지만 내가 보지 못해서인지 겨울이 온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난 주말 아침부터 내린 눈은 찜찜했던 겨울 맞이를 개운하게 만들어줬다.
기분이 좋아져 눈이 오는 날 떠오르는 몇몇 작품을 꺼내 보았다. 그중 올해 유독 시선이 간 작품은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1830∼1903)의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The Boulevard Montmartre on a Winter Morning, 1897)’. 물감으로 시리게 표현한 화면에서 내가 맡고 있는 겨울 냄새와 같은 것이 풍겼다. 분명 작품은 19세기 말 파리의 모습인데 같은 공기를 공유하는 듯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의 주인공처럼 나도 오래전의 파리로 길을 들어선 느낌이었다.
#인상주의 작가들의 스승, 카미유 피사로
카미유 피사로는 1830년 서인도 제도의 세인트 토마스 섬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파리 근교에서 기숙사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피사로는 미술 시간을 남달리 좋아했고 그림에 흥미를 처음 느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교사의 조언을 따라 고향 마을의 자연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집안의 반대가 있었지만 스무 살이 넘은 뒤에는 파리로 거취를 옮겨 작업을 본격화했다.
파리에서 예술가로 자리 잡고자 마음먹은 피사로는 에콜 데 보자르에 진학했다.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 있는 예술학교다. 특히 피사로가 진학한 시기에 그 명성은 세계적이었다. 체계적인 미술 교육을 받으며 작가 작업실에서 조수로 일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그곳의 정형화된 교육 방식이 자신과 맞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대안을 찾아 떠난 곳은 스위스 아카데미였다. 클로드 모네, 아르망 기요맹, 폴 세잔 등을 만난 장소다. 그는 이들과 함께 때로는 작품에 관해, 때로는 미술계 제도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술계 제도권에 관한 이야기는 아마 파리의 살롱전을 둘러싼 내용이었을 것이다. 당시 파리의 살롱전은 작품을 선보이고 데뷔하는 등용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살롱에서 원하는 웅장한 작품 스타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꾸준히 자연에 관심을 기울여 풍경을 담아냈다.
파리로 돌아온 뒤 그는 화가들 사이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전형적이지 않은 작품을 살롱전에 내놓은 이유가 컸다. 이 무렵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을 피해 런던으로 피난을 갔다. 런던에서 머물며 모네와 함께 터너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한 것은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돌아온 작업실에는 1000점이 넘던 작업 중 40여점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힘을 내서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활발히 활동하며 전성기를 맞았다. 1874년에는 생각이 맞는 작가들과 전시를 마련했다. 바로 현대 미술사에 역사적 전시로 일컫는 인상파 전시다. 풍경을 표현하는 방법에 관한 오랜 고민과 연구는 여기서 빛을 발했다. 사진의 등장과 함께 회화가 새로운 국면을 맞은 때였다. 인상파는 대상을 똑같이 묘사하는 것 이상을 해냈다.
피사로는 이후 인상파 전시에 매회 출품해 그룹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최연장자로서 미술에 관한 논의를 끌어내고 함께 나누는 것에 앞장섰다. 세잔이 훗날 피사로는 자신들의 스승이었다고 말한 이유다. 그런데도 그는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로 여겨지지 않으며 과소 평가받은 경향이 있다. 훗날 짧은 붓 자국을 남기는 점묘법 형식의 작업을 하는 등 작업 양식이 급격히 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말년에 눈병으로 작품활동이 어려워졌음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1903년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카미유 피사로가 담은 19세기 프랑스
‘추수, 퐁투아즈(The Harvest, Pontoise, 1881)’는 추수 중인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나무로 둘러싸인 낮은 언덕에서 세 명의 사람이 일하고 있다. 앉아있는 여인이 농작물을 거두어 옆의 바구니에 넣고, 그 바구니가 가득 차면 앞의 사람에게 건넨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그 바구니 안의 것을 거대 포대 안에 붓는다. 인상 깊은 것은 농민들의 이러한 모습이 마치 노동자와 같이 보인다는 것이다. 밀레의 ‘만종(The Angelus, 1857∼1859)’과 같은 기존의 농민이 담긴 작품에서 그들을 자연에 순종하는 인물로 묘사한 것과 다르다. 여기서 농민은 주체를 가진 개인으로 공동체적 조화 속에서 자연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는 ‘추수, 퐁투아즈’와 전혀 다른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대형 건물들이 자리 잡고, 마차와 사람으로 거리가 가득 찬 이곳은 파리다. 오스망의 도시계획에 의해 깔끔하고 넓게 펼쳐진 파리의 대로 위에는 여유가 없다. 우측 하단에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듯한 인물의 모습에 웃음이 난다. 추운 날 양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걷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다. 이렇게 근대화 시기 파리와 파리 시민의 일상적 모습이 화면 곳곳을 채우고 있다.
피사로는 작품활동 대부분의 기간 풍경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 풍경화들은 어린 시절 보고 자란 전원의 모습을 담았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이었던 인생의 마지막 십 년 동안 그는 도시의 모습도 그렸다. 당시 프랑스는 전에 없던 커다란 변화를 경험하고 있었다. 산업화 발전과 함께 파리에 인구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은 농촌에서는 인구 유출, 도시에서는 취업 문제를 등장시켰다. 전에 없는 문제의 등장에서 생겨난 사회적 불안정성은 인간의 고립과 고독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작품 안에 인간을 등장시켰다. 풍경을 그리며 그 안에 담긴 인간 삶까지 다루고자 했다. 농촌 풍경화에서는 농부에 애착을 가지고 노동의 신성함을 표현하고 도시 풍경화에서는 인간을 거대한 건축물과 조화시키며 개개인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앞서 언급하였듯 피사로의 작업세계는 함께 활동한 세잔이나 고갱보다 많이 주목받지 못했다. 그것은 인상주의라는 형식적인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작품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것은 피사로 작품 안에 담긴 이러한 의미를 알 기회가 적다는 것이다.
#시간 여행으로부터의 귀환
피사로는 런던 피난 시절 터너의 ‘눈과 얼음의 효과’에 사로잡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주로 모네와 함께 눈에 관한 연구와 실험을 펼쳤다. 그리고 적당한 거기를 두고 볼 때 눈은 흰색이 아니라 다양한 색이 포개어진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눈이 자연을 덮은 풍경, 잔설이 남아 있는 오솔길, 눈 덮인 길에 잠깐 해가 드는 순간 등을 그렸다.
피사로가 남긴 눈 그림은 이렇게 다양하다. 하지만 여전히 ‘겨울 아침의 몽마르트르 대로’가 가장 좋다. 아마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가장 공감이 가는 장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는데 여전히 내가 맡고 있는 겨울 냄새가 느껴진다. 생각해보면 공기는 대기를 순환하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피사로가 이 작품을 그리던 순간의 공기가 지금 내가 있는 공간에 닿았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작품을 바라보니 신기함을 넘어선 신비로움이 느껴진다. 동시대 미술 일을 주로 하지만 오래된 그림의 매력도 참 강하다. 자꾸 나만의 계기를 만들어 더 많이 찾아보는 이유다.
김한들 큐레이터, 국민대 미술관·박물관학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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