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정부 들어 ‘바람 잘 날이 없는’ 공공기관들 가운데 하나가 대한법률구조공단이다. 정권 출범 초기 공단 이사장이 이른바 ‘적폐’로 몰려 해임되더니, 현 정부와 ‘코드’가 맞는 것으로 알려진 현 이사장 체제 아래에선 소속 변호사들의 불만 표출이 잇따르고 있다. 문 대통령 공약에 따라 공단이 내년부터 운영할 예정이었던 이른바 ‘형사공공변호인’은 국회의 관련 예산 삭감으로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노조 "원만한 합의 위해 노력" VS 공단 "변호사들의 기득권 지키기"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공단 소속 변호사 노조는 전날 임시총회를 열고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했다. 변호사로만 구성된 노조도 국내에선 보기 드물지만, 변호사들이 쟁의행위에 나서는 것 역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노조는 공단에 △소송 성과급 50% 인상 △근속승진 도입 △시간외 수당 신설 △변호사 인력 확충 △변호사 1인당 처리 사건 수 제한 △임기제 변호사 제도 철회 등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조 관계자는 언론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원만한 합의를 위해 노력했음에도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 못했다”고 파업에 이르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공단측이 계속 비협조적 태도로 나오고 있어 파업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공단은 이날 낸 보도자료를 통해 노조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공단은 “공공기관으로서 예산과 정원에 관해 기획재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고 있다”며 “임의로 정원을 증원하거나 무분별한 임금 인상으로 국가 예산 낭비, 공단의 재정 적자를 초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로스쿨 개원 이후) 변호사가 2만5000명이 넘는 등 법조 시장이 급변했는데도 변호사 노조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고자 시장 상황과는 정반대의 높은 수준의 처우를 요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공단은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지갑이 얇아 변호사 선임을 하기 힘든 서민들한테 무료 법률구조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설립 목표다. 파업 등으로 공단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되면 그 피해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약자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셈이다.
◆정권교체 이후 바람 잘 날 없어… 형사공공변호인 예산 전액 삭감도
문제는 2017년 5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공단이 끊임없는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박근혜정부 시절 임명된 이헌 이사장이 3년 임기를 채우지 않은 상황에서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해임됐다. 공단의 상급기관으로서 감독권을 가진 법무부는 “이 이사장이 취임 후 공단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하지만 법조계에는 박근혜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장들을 ‘적폐’로 몰아 내치는 과정에서 이 전 이사장이 희생된 것이란 시각이 많다. 이 전 이사장이 과거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일하던 시절 위원장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 유족과 마찰을 빚은 점을 문재인정부가 마뜩잖게 여긴 결과라는 분석도 있다.
새 이사장에는 문 대통령 본인을 비롯해 현 정권 실세를 대거 배출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출신 조상희 변호사가 기용됐다. 자연히 ‘민변의 몸집 불리기’, ‘낙하산’, ‘코드 인사’ 같은 뒷말이 나왔다.
조 이사장 취임 후 공단은 “한정된 예산과 인력으로 더 많은 국민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자”는 명분 아래 임기제 변호사 도입, 개방형 직위 변호사 임명 등 다양한 개혁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과정에서 공단 지휘부와 소속 변호사들 간에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조직의 인화단결도 상처를 입었다.
법무부는 문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에 따라 장애인 등 사회적 취약계층이 수사 단계에서부터 국선변호인 조력을 받을 수 있는 ‘형사공공변호인’을 도입하기로 하고 내년도 예산으로 약 18억원을 편성한 바 있다. 이 제도는 공단이 별도 위원회와 사무국을 설치해 운영을 맡는 것으로 돼 있다. 하지만 국회는 최근 예산 심의 과정에서 “형사공공변호인이란 제도 신설을 위한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전액 삭감해버렸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