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것만 보기’, 역사 왜곡의 전형적인 형태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화를 위해서라면 주변의 지적, 비판이야 무시해 버리고, 바르게 고치겠노라는 약속은 내팽개치면 그만이다.
일본 정부가 자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 철강, 조선 및 탄광’(이하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다루는 태도가 꼭 그렇다. 세계유산에 등재하던 2015년 7월, 일본 정부는 여기에 포함된 일부 시설에서 주변국 국민들이 가혹한 조건 아래 강제 노역을 한 사실을 알리고,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여지껏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서양의 산업혁명 물결을 수용하고 공업입국의 토대를 쌓은” 시설로만 선전하고 있다.
지난해 말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에 근대산업시설에 관한 종합적 정보 제공, 관련 인력 양성 등을 위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한 시점이 이번달까지다. 센터는 도쿄 총무성 제2청사 별관 일부에 들어설 예정이며, 어떤 내용을 알릴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난망한 일이긴 하나 약속대로 한국인, 중국인, 연합군 포로 등 수만 명이 해당 시설에서 겪은 참상을 자백할지 주목된다.
◆수만 명 강제노역 딛고 선 일본의 세계유산
일본 근대산업시설은 19세기 중반∼20세기 초 철강, 조선 및 탄광 산업의 발전상과 이를 통한 산업화를 보여주는 23개의 철강·조선·탄광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유네스코는 일본 근대산업시설이 “서구의 산업화가 비서구권으로 성공적으로 이식되었다고 여겨진 최초의 사례로서 그 증거들을 간직하고 있다”며 “고고학 보고서와 조사, 그리고 공공과 민간의 기록보관소에 소장된 대량의 역사 자료가 뒷받침되고 있으므로 1차 사료로서 진정성 수준이 높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일본 근대산업시설에 담긴 제국주의의 폭력성과 주변국에 저지른 만행 등을 보여주지 못한다. 민족문제연구소와 일본 시민들로 구성된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가 2017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일본 근대산업시설에 포함된 야하타제철소, 나가사키조선소, 다카시마탄광, 미이케탄광 등에서 강제 노동을 한 한국인은 약 3만3400명에 달한다. 중국인은 4184명, 연합군 포로는 5140명으로 파악됐다. 사망자 수는 알려진 것만 해도 160여 명에 이른다.
우경화로 인한 왜곡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는 일본 교과서도 20세기 초 강제동원 사실은 전하고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에 따르면 교육현장에서 채택률이 가장 높은 동경서적의 교과서에는 “다수의 조선인과 중국인이 의사에 반하여 일본에 끌려갔으며, 광산과 공장 등 열악한 조건 하에서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익으로 분류되는 육붕사(六鵬社) 교과서조차도 “일본의 광산과 공장 등에 징용되어 혹독한 노동을 강용당한 조선인과 중국인도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세계유산 등재 당시 우리 정부가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이런 성격을 지적하자 유네스코는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전략’을 마련하라”고 권고했고, 일본 정부도 수용하며 “정보 센터 설치 등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조치도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등재를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등재 직후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을 인정한 것은 아니다”고 발뺌을 했고, 지금까지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중공업의 커다란 변화, 국가의 질을 변화시킨 반세기의 산업화를 증언하고 있다”고만 소개하고 있다.
◆‘만들어진 신화’ 위해 진실에 눈감은 일본 정부
자국의 교과서에도 실린 사실을 외면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는 일본 정부의 속셈은 뻔하다. 일본 근대산업시설을 통해 선전하려는 ‘자랑스러운 역사’에 자신들의 만행에서 비롯된 고통을 집어넣지 않겠다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남상구 소장은 “일본 근대산업시설에는 메이지유신을 거치며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민들이 똘똥 뭉쳤다는 신화가 반영돼 있다”며 “‘아름다운 일본’의 이미지를 위해 강제동원 사실은 반영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지금까지 보인 태도나 정치적 성향 등을 고려할 때 일본 근대산업시설의 ‘흑역사’를 자발적으로 밝힐 것을 기대하는 건 어렵고, 외부적으로 강제할 만한 수단도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강제동원을 포함한 전체 역사를 이해할 해석전략을 마련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는 강제성이 없어 따르지 않아도 무방하다. 등재 취소를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는 해당 유산의 훼손, 유산에 영향을 주는 주변 환경의 부정적인 변화 등이 명확할 때라야 내리는 조치다. 관련 역사를 제대로 알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는 취소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한국 말고는 이런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국가가 없다는 점도 일본 정부의 버티기에 유리한 사정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일본 근대산업시설과 관련된 강제동원의 역사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행하겠지만 속도가 느리다’고 한다”며 “센터가 어떻게 운영될지를 지켜보고 있다. 국제사회의 압박이 커져 일본 정부 스스로 강제동원과 관련된 사실을 제대로 알리도록 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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