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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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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4-06 22:46:44 수정 : 2020-04-06 22:4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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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쓰다 보면 심심찮게 ‘쉬운 우리말 쓰기 협조 요청’ 메일을 받는다. ‘어려운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바꿔달라는 내용이다. 메일 하단에 문화체육관광부 발신이라는 표기는 자못 엄격·근엄·진지함을 더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공직자들이 불철주야 바쁜 시기에도 기사를 하나하나 정독하며 귀신같이 외국어를 잡아내는 데에 감탄이 나온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말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

경제기사를 쓰다 보면 ‘펀드’, ‘코스피’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이들 단어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문광부는 펀드를 ‘기금’으로, 코스피를 ‘거래소 시장’으로 바꿔달라고 한다. 응용버전으로 사모펀드는 ‘소수투자자 기금’으로 써 달란다. 이쯤 되면 무엇이 어려운 외국어고, 쉬운 우리말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리스크’를 ‘손실’로 해달라는 문광부의 요청은 아예 오보를 낳는 지침이다. 경제학적으로 리스크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위기’로 관리하고 대비해야 할 때 쓴다. ‘리스크’를 ‘손실’로 표기하면 명백한 오보다.

언어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다.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달라지면 사용자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모한다. 언어를 바꾸는 이유는 친목·유희·용어정의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언어 사용자의 편의성이다.

과거 우리나라가 북한에 못지않게 순수 우리말 사용을 고집했던 시절, 각국의 이름을 우리말로 표기했던 적이 있었다. 프랑스를 ‘불란서’로, 스페인을 ‘서반아’로 불렀다. 시간이 지나고 우리나라가 글로벌화를 겪으면서 사용자들은 음역어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읽기 불편하고, 소통이 어려워서다. 사용자들은 자연스럽게 말하고 쓰기 편한 프랑스, 스페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반면에 영국, 미국 같은 나라명은 음역어가 더 편리해서 사용자의 선택을 반영해 그대로 남았다.

순수 우리말 사용이 최우선이라는 정책은 언어의 ‘갈라파고스화’를 낳는다. 쉽게 말해 국제적인 ‘왕따’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커피는 아랍어인 ‘카흐와’에서 시작해 세계 공용어로 자리 잡았다. 반면 일본 정부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커피를 ‘고히’라고 부르게 했다. 물론 이제는 커피라고 말해도 어느 정도 알아듣지만, 아직도 작은 도시나 오래된 카페에 가서 커피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커피’라는 단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가 됐다.

일본까지 갈 것도 없다. 북녘의 땅에서도 소수의 지배층이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부르게 한다거나, 전구를 ‘불알’로 쓰게 했다. 지금은 북한 사람들도 우습게 생각하는 정책이지만,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199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북한을 본받아야 한다”는 촌극을 벌였다.

누군가의 상상속에는 우주여행이 가능했을지도 모를 2020년에 정부가 우리말 사용을 고집하는 걸 보니, 안 그래도 재미없던 촌극의 재방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 아예 이참에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바꾸자. 이제는 북녘의 땅에서도 쓰지 않는 순수 우리말 정책을 고집하면서 국제적인 왕따로 장렬하게 산화하는 것이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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