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7일 기자회견 이후 정의연(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을 둘러싼 이슈가 연일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돕고 진상을 규명하려는 목적으로 출범한 단체에서 내부 갈등으로 인해 촉발된 문제인지라 코로나19로 이미 고단한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고 있다.
아직 진행되고 있는 현안이라 잘잘못을 단정 짓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해진 사실과 당사자들의 사과 내용만으로도 시민단체의 세심하지 않은 운영으로만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십분 양보해 실수나 관행이라 하더라도 윤미향 전 정의연 이사장의 국회 진출과 맞물려 시민사회의 근간인 시민단체의 조직과 운영방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본래 시민사회는 근대사회에서 권력이 집중되는 국가·정치 영역과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경제 영역 간 긴장 관계를 중재하며 소외된 시민들의 다양한 참여를 이끄는 중간 층위의 역할을 담당하는 사회 영역이다. 따라서 시민사회는 일반적으로 도덕성과 연대의 기반 위에 시민단체로 대표되는 자율 결사체의 행위를 통해 구현된다.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보더라도 시민단체들이 민주화를 이끌고 정치권력과 재벌의 무분별한 확대를 견제하며, 사회 어두운 곳을 비추는 역할을 해왔음은 대다수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시민사회의 ‘척추’와 다름없는 시민단체는 더욱 높은 도덕적 기준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 물론 사람이 모이는 집단에서는 언제나 잘못이 발생하고, 본의와는 다르게 비치는 상황도 나타나기 마련이기에 시민단체에만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시각이 가혹하다는 의견도 있다. 감시의 눈을 피해야 했고 뜻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만으로 겨우 운영될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도하지 않은 오류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본래 권력과 자본을 통해 비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와 경제 영역을 보완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정치 및 경제 영역과 동일한 기준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선한 의지를 뒷받침하는 ‘올바른 과정’의 시행은 시민단체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본 조건이며 21세기의 도덕성은 투명한 운영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시민단체는 깨달아야 한다.
날로 커지고 있는 시민단체의 ‘권력지향성’ 역시 변화되어야 한다. 사실 시민단체의 정당성은 권력과의 거리두기에서 비롯되나 현실에서 시민단체는 정치권으로의 ‘줄대기’ 통로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19대 국회의 의원 출신 직업 가운데 14.3%가 시민단체 출신이란 점은 이미 시민단체를 활용해 권력에 가까워지려는 사람이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청와대나 지자체에서 근무하기 위해 시민단체 직위는 좋은 스펙으로 작용한다. 물론 시민단체 출신 인사 가운데 능력이 있고 필요한 경력을 쌓은 사람도 많다. 주류의 시각에서 소외된 사회 현안을 정책과 행정에 반영하는 데 시민단체 출신 인사의 경험이 도움될 수 있다. 다만 이번 윤미향 국회의원 당선자의 경우와 같이 시민단체가 지켜야 하는 책임과 역할 수행에 미흡했던 사람들이 권력으로 유입되면 이는 견제와 연대라는 시민사회의 기본가치가 훼손될 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영역의 무분별한 확대로 이어져 역사의 후퇴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시민사회는 올바른 국가 운영 및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회 영역이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될 필요가 있으며 시민단체 역시 그 본질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반영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시민단체는 엄혹했던 시기에 당위성과 선의만으로도 인정받던 시대는 지났음을 깨닫고 새로운 존재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자율성과 다원성에 근거한 투명한 사회구조의 뉴노멀(New Normal) 시대의 기대에 부합하는 시민단체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해 본다.
김중백 경희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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