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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잘게 쪼개진 노동… ‘좋은 일자리’ 선호 기준도 진화 중 [탐사기획 - 노동4.0 별 ‘일’ 없습니까]

, 탐사기획 - 노동4.0 별 '일' 없습니까

입력 : 2020-06-03 06:00:00 수정 : 2020-08-05 16: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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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화하는 일자리 형태 / 기술의 발달로 일자리 소멸·생성 계속 / 튕겨나간 사람들, 플랫폼 노동 등 종사 / OECD 중 28개국 시간제근로자 비중↑ / 정부 ‘비정규직 제로화’ 사실상 불가능 / 20대, 고용안정성만큼 ‘워라밸’ 중시 / 76% “투잡 긍정적”… 60대比 16%P↑ / 짧은 노동시간·개인시간 보장 선호 / “고용보험·차별 철폐 등 제도화해야”
#. 오전 10시 느지막하게 아침을 맞았다. 본격적인 ‘일’은 한 시간 뒤부터 시작된다. 그 사이 점심을 겸한 아침 식사는 필수다. ‘그 일’을 하려면 무엇보다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 오전 11시쯤 본격적인 일터로 향한다. 일터라고 해봐야 딱히 정해진 곳은 없다. 상가가 밀집한 도로가 출근 장소다. 자전거와 헬멧, 배달용 가방, 충전된 휴대전화와 여분의 충전기만 있으면 된다.

몇 분 뒤. 칼국수집에서 첫 ‘콜’이 왔다. 하지만 이 콜은 무시하기로 했다. ‘초짜’면 덜컥 잡겠지만, 이곳은 점주의 시간 압박이 강해 ‘기피대상 1호’로 꼽힌다. 두 번째 콜. 무난한 돈가스 배달이다. 배달해야 할 길이 낯선 곳이지만 배달 경로는 스마트폰 앱에서 인공지능(AI)이 추천해 준 길로 가면 그만이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자전거 배달이 점점 힘들다. 하지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돈을 벌기에는 나쁘지 않다. 늦은 점심시간까지 4시간가량을 달려 3만원을 벌었다. 나머지 시간은 친구를 만나거나 컴퓨터 게임을 한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린 날에는 일하지 않는 때도 많다. 주말에는 가끔 친구 대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남들이 얘기하는 ‘취업’을 하겠다는 생각은 아직 없다. 지금의 ‘일’에 만족한다.

 

20대 A의 하루를 재구성한 글이다. A가 ‘하는 일’은 배달과 편의점 알바다. 그의 일은 ‘좋은 일자리’일까? 주업과 부업이 확실치 않고, 조사기간에 따라 취업자 분류 기준도 아슬아슬하다. A는 나름 만족하며 일하고 있지만, 제도는 ‘글쎄’라고 말한다.

◆기술적 실업과 비정규직

일자리는 변화한다. 기술 발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일자리는 생겨나고 없어진다. 공식 집계에 따르면 2019년 우리나라의 직업은 1만6891개다. 1969년 최초 집계(3260개)에서 5배가량 늘었다. 하지만 직업의 수와 일자리의 증가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일자리의 소멸과 생성을 예측하는 것은 ‘미지의 영역’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AI와 로봇을 앞세운 기술이 노동을 파편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게 쪼개진 일자리는 전통적인 방식의 고용 구조를 흔들고 있다. 과거에는 한 명의 ‘인간 노동자’가 할 일이 기술과 자본으로 세분화하고 있다. 5명의 직원을 쓰던 매장에서 키오스크와 플랫폼 배달을 통해 2명의 직원을 줄인다. 떨어져 나간 노동자 중 한 명이 하루 4시간 근무하는 플랫폼 노동자로 전환되는 구조다.

최근 20년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시간제근로자 비중이 증가한 국가는 28개국에 달한다. 임시직 근로자 비중도 같은 기간 32개국 중 20개국에서 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규직 비율은 60%대에서 크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 문재인정부 들어 ‘비정규직 제로화’를 앞세웠지만, 지난해에는 오히려 정규직 비율이 전년 대비 감소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비정규직 비율은 63.6%이며, 특수형태근로자 수는 집계 가능한 숫자만 52만명을 넘어섰다.

반가운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은 “노동자를 보호하자는 주장이 모든 사람을 정규직으로 만들자는 얘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라며 “4차 산업혁명 시대 새로운 형태의 고용이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기존의 정규직, 비정규직 틀로 들이대면 빈 곳이 너무 많아진다”고 말했다.

 

◆전환의 시대… 좋은 일자리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일자리는 정규직, 좋은 일자리, 노동조합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 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된다. 플랫폼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변화 못지않게, 노동자들이 원하는 ‘좋은 일자리’도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정규직 대 비정규직’의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정규직은 법적 용어가 아니다. 비정규직을 규정하면서 상대 용어로 사용될 뿐이다. 관련 법에 존재하는 정규직에 가장 가까운 표현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이다.

황세원 LAB2050 연구위원이 최근 펴낸 ‘정규직이란 무엇인가’ 보고서에 따르면 좋은 일자리에 대한 인식은 세대별로 차이를 드러냈다. 좋은 일자리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3순위까지 선택하라는 질문에 20대의 경우에는 1위가 ‘연차 및 휴일 보장, 정시 퇴근 등으로 직장 밖 개인 시간이 보장되는지 여부’를 꼽았다. 1순위만 선택할 경우 ‘고용 안정성’을 꼽았지만, 선택의 폭을 넓히면 ‘워라밸’(일과 여가생활의 균형)을 더욱 선호한다는 의미다.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에 대한 세대별 인식 차이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투잡·N잡 등으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긍정 비율은 전 연령대 기준 70.2%였다. 연령별로는 20대의 긍정 비율은 75.8%, 60대는 59.5%로 16%포인트가량 차이를 보였다. ‘하루에 4∼5시간 동안만 일하는 것’에 대한 긍정 비율도 20대와 60대가 각각 86.5%, 56.1%로 큰 차이를 드러냈다. ‘주 3일 또는 4일만 일하는 것’에 대한 긍정은 20대가 83.4%로 60대(48.4%)의 두 배에 달했다.

◆결국 사회안전망으로

다시 A의 생활로 돌아가 보자. A는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는’ 정규직 노동자를 원하지 않는다. 하루 4∼5시간 정도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 일하고 싶다. 다만, 현재의 만족한 삶이 지속 가능할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을 뿐이다.

A를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고용안정성과 차별 철폐다. 고용 안정성은 대표적으로 고용보험의 틀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개선되고 있다. ‘전 국민 고용보험’을 골자로 한 ‘문재인케어’의 등장도 이 같은 흐름이다.

황세원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좋은 일자리의 기준으로 고용안정성과 임금 수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질문 방법에 따라 짧은 노동시간과 개인 시간 보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며 “차별이라는 문제만 없다면 더 다양한 형태의 일자리들이 좋은 일자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AI와 로봇에 일자리의 상당 부분을 내줄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다른 형태의 노동을 찾아야 한다. 독일은 ‘인더스트리 4.0 백서’에서 미래 노동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시원한 바닷가에 편안히 앉아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일하는 창의적 지식 노동자, 또는 컴퓨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원하는 작업 스케줄을 짜는 생산직 노동자 등이 현재 우리의 이상향이다.”

 

특별기획취재팀=안용성·윤지로·배민영 기자 ysah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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