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우수성은 외국 학자들에게도 찬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일본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는 저서 ‘한글의 탄생’을 통해 한글 자형의 과학적 조형성을 극찬하며 세계적인 ‘보물’로 칭했다. “왕이 주도한 ‘앎과 글쓰기 생활의 혁명’”이라고도 했다. 영국 역사가 존 맨은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극찬했다. 개화기에 한국과 한글을 사랑한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는 한글은 완벽한 문자라며 최소 문자로 최대 표현력을 갖는다고 했다. 외국 학자들이 이런 찬사를 보내지만, 작금의 한글 현주소는 찬밥신세나 다름없다. 거리엔 영어 간판 천지이고 정부기관마저도 국적 불명의 외래어를 남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의식 있는 한글 관련 단체나 인사들은 외롭게 한글운동을 펼치고 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최홍식(67) 회장이다. 최 회장은 한글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외솔 최현배(1894~1970) 선생의 손자다. 이비인후과 의사이자 음성의학자로 조부의 뜻을 이어 한글운동과 세종대왕 선양사업에 헌신하고 있다. 얼마 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운영난을 겪자 사재 10억여원을 쾌척해 외솔정신을 계승한 ‘나라 사랑 DNA’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지난 7일 서울 동대문구 홍릉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최 회장을 만났다. 그로부터 외솔에 대한 회고와 그의 한글운동과 세종대왕 선양사업 등에 관해 들었다. 최 회장과 오랜 인연이 있는 이대로 한말글문화협회 대표는 “외솔의 셋째 아들 최신해(청량리 뇌병원장, 수필가)의 아들로서 손자 가운데 생긴 모습부터 외솔 선생을 가장 많이 닮았고 외솔 정신까지도 쏙 빼닮은 한글 운동단체의 소중한 분”이라고 귀띔했다.
- 외솔 최현배 선생은 어떤 분인가.
“일제 치하에서 조선어학회를 창립하고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만드는 등 우리말 보급과 교육에 앞장서신 분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도 미 군정청 교과서 편수국장과 한글학회 이사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대표 등을 역임하며 국어학 연구와 국어정책에 힘을 쓰셨다. 특히 국어 문법의 체계화, 한글전용 추진, 한글 기계화 사업에 족적을 남기셨다. 한글운동에 관심이 있는 분은 조부님에 대해 잘 알지만, 젊은층에선 잘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글의 중시조가 주시경 선생이라면 그의 제자로 우리말 문법 체계를 완성한 분이 조부님이다.”
- 코로나19 여파로 한글날 기념행사를 제대로 갖지 못했는데.
“올해는 조부님이 돌아가신 지 50돌이 되는 해다. 그래서 한글날이 더 뜻깊은 날이 되어야 하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제대로 기념하지 못해 아쉽다. 코로나 난리 와중에도 6일 한글회관에서 제12회 집현전 학술대회를 열었다. ‘우리말 사용의 실태 그리고 순화와 표준화’를 주제로 10개의 주제발표를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저는 내일 조부의 기념관이 있는 울산시 주최 기념행사에는 참석할 예정이다. 조부가 부총장으로 재직했던 연세대에서는 외솔전집을 발간할 계획이다. ”
- 외솔회를 이끌며 한글학자 지원과 한글 운동 확산에 기여를 하고 있는데.
“외솔회는 조부님이 돌아가시던 해인 1970년 삼촌인 최철해 정음사 사장이 지인들과 함께 만드셨다. 외솔의 나라사랑과 한글사랑 정신을 이어받자는 뜻이었다. 외솔상 시상식을 매년 열어 학문 분야에 크게 기여한 분께 드리는 ‘문화 부문 외솔상’과 우리말과 한글의 사용을 잘하신 분께 드리는 ‘실천부문 외솔상’을 시상하고 있다. 한글운동과 한글 발전에 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울산시에 건의해 이뤄낸 외솔 생가 복원, 외솔기념관 건립 등도 외솔회의 귀한 사업 성과물이다.”
-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 그간의 활동과 업적은.
“조부님이 세종정신을 기리기 위해 정부에 제안하여 1956년 만들어진 사업회다. 세종대왕 신도비, 구영릉 석물과 같은 유물들을 발굴해 모아 왔고, 세종실록 국역을 시작으로 조선왕조실록 국역사업 등 조선시대 만들어진 수많은 책을 현대국어로 번역하여 보급해왔다. 하나 이곳이 세종이라는 큰 인물을 담기에는 공간이 협소하고, 기념관도 초라하다. 세종대왕을 제대로 기리는 새로운 세종대왕기념관 건립이 사업회 목표다. 제 생각인데 용산 한글박물관과 연계해 건립하면 좋을 듯하다.”
- 사재 10억여원을 사업회에 쾌척했는데.
“세종대왕기념관이 세워진 이 땅은 정부 소유다. 이 안에 있는 세종박물관과 세종대왕기념사업회는 정부 직영 단체가 아니라서 대지 사용료를 매년 수억원씩 내야 한다. 사업회가 특별한 수익을 내기 어려워 그간 부채가 누적됐다. 제가 회장에 취임하면서, 부채를 줄이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 기부금을 내놓은 것이다. 사실 사업회 현실이 막막하다.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특단의 정부 및 국회 차원에서의 대책 마련이 꼭 필요하다. 효창공원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은 비슷한 의미의 기념관인데 김대중정부 때 특별법이 만들어져 대지 사용료 등을 내지 않는 것과 대비된다. 당국과 언론의 관심이 절실하다.”
- 외솔 선생에 관한 일화를 소개한다면.
“엄하셨지만 자상한 면도 많았다. 특히 국산품 애용에 대한 신념이 대단하셔서, 손자녀들이 외제 학용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바로 지적하셨다. 국산품을 사용하는 것이 나라사랑의 길임을 일깨워 주시곤 하셨다. 대화 시에도 존댓말을 잘못 사용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나무라며 지적하셨다. 어느 날 우리 집에 불쑥 방문하셔서 제 형(최문식 청량리정신병원장)과 저를 앞에 앉혀 놓고 화선지에 한글 붓글씨로 즉석에서 글을 남겨 주셨다. 그 내용은 “날마다 날마다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일생을 통하여 변찮는 한가지 일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한글날만 되면 조부님이 그립다. 10년 전에 조부께서 쓴 ‘한글이 목숨'이란 글이 언론에 공개됐다. 당시 외솔회 이대로 부회장이 일제 때 한 음식점 방명록에 쓰여 있는 조부님의 글을 공개한 것이다. 1932년 서울의 한 음식점 주인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방명록 ‘금서집(錦書集)'에 외솔 선생이 ‘한글이 목숨, 최현배’라고 쓴 붓글씨 한 장이다. 당시 거의 모든 지식인이 한자만 쓰던 일제강점기인 1932년에 ‘한글이 목숨’이라고 방명록에 쓴 붓글씨가 얼마나 한글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알 수 있는 뚜렷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 한글운동가이면서 음성의학과 후두질환 분야 권위자이기도 한데.
“의사 집안이라 할 수 있다. 외솔의 둘째 아들인 작고하신 아버님은 우리나라 정신과의사의 태두다. 청량리뇌병원(후에 청량리정신병원)을 개설하셨다. 제 형님 최문식 원장도 의사가 되어 아버지 병원을 이어받았다. 저도 자연스럽게 의학의 길을 걷게 됐다. 전문 분야를 정하게 되면서는 이비인후과 중에 목소리와 조음 등을 다루는 후두학을 전문 분야로 정하게 됐다. 할아버지가 해 오셨던 한글연구 중 조음음성학 분야에 관심이 있기도 해서 이 길을 걷고 있다. 나름대로 후두학, 음성언어의학의 발전과 어려운 후두질환의 해결에 작게는 이바지했다고 자부한다. (사실 그는 이비인후과 분야 국내 대표 명의다. 질환 중 목소리의 떨림과 끊어짐이 심하여 고통받는 연축성발성장애 환자들의 증상을 완화하는 보톡스 성대주입술의 국내 보급에 기여했고, 난치 질환 성대구증의 수술적 치료를 자체 개발하여 성공해 국제적으로도 명성이 있다. 김대중·박근혜 전 대통령 이비인후과 자문의였다.)”
- 음성의학 측면에서 훈민정음 글자체계를 분석한 논문도 발표했는데.
“세종대왕께서 1446년에 발성기관의 모습을 본떠서 자음을 만들었다. 창살 모양을 보고 만들었다거나 고대 문자를 본떴다는 등의 각종 억측이 난무했으나 과학적인 글자체계임이 증명되고 있다. 어금닛소리 글자 ㄱ은 혀뿌리가 목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혓소리 글자 ㄴ은 혀가 윗잇몸에 닿는 모양을 본떴고 입술 소리 글자 ㅁ은 입모양을 본떴다. 잇소리 글자 ㅅ은 이모양을 본떴다. 목구멍소리 글자 O은 목구멍 모양을 본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를 글자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음성의학적으로 생각해봐도 과학적인 글자로 놀랍다. 요즘도 제자들과 함께 제일이비인후과의원을 시작해 대표원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원내에 천지인발성연구소를 만들었다. 훈민정음 창제 시 제자 원리를 음성의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을 하고 있다. 조부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한글 연구에 나름의 기여할바를 꾸준히 찾고 있다.”
- 한글 오남용 실태에 대한 평가와 당국에 건의하고 싶은 내용은.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좀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과거에는 한자에 너무 의존했는데 이제는 영어 오남용이 심각해 한글을 훼손하고 있다. 거리에 나가보면 영어 천지다. 영어 간판이 많아 외국 관광객이 서울 도심에서 사진을 찍으면 한국에서 찍은 사진인지 외국의 도시에서 찍은 사진인지 알 수가 없다. 한심한 일은 정부와 공공기관이 영어 오남용에 앞장서고 있다는 점이다. 비교하긴 싫지만, 이웃 나라 일본은 모든 상품 설명서나 학술행사, 길가의 광고문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일어로만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대대적인 한글사랑 운동을 펼치기 위해 무슨 수를 내야 한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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