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족에 모멸감… 편견 유발”
국회서도 개정안 발의 ‘흐지부지’
정부 차원 ‘치매국가책임제’ 필요
“저희는 명칭 변경이 치매 인식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사람들 생각이 변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많은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서울 양천구 신목고등학교의 자율동아리 ‘치매체크’를 운영 중인 1학년 장세진(16)양은 최근 세계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치매를 ‘인지에 문제가 생기는 질병’으로 받아들이려면 이름부터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름을 바로잡는다는 뜻의 ‘정명(正名)운동’이라 부르는 이러한 움직임에는 치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 개선과 함께 환자의 치료 문턱을 낮춘다는 의미 등이 깔렸다. 장양은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치매를 대체할 이름을 찾아 달라’는 글을 올렸다.
◆“반인권적 이름” “차별적 병명으로 낙인”… 정명 촉구의 배경
장양처럼 ‘치매정명’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이전에도 있었다. 지난해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치매라는 반(反)인권적 이름을 바로잡기를 바란다”거나 “차별적 병명 때문에 환자에게 낙인이 찍힌다”며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글이 올라와 각각 1300여명과 300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치매정명의 배경은 단어 의미에서 시작한다. 한자로 쓰이는 ‘치(痴)’와 ‘매(?)’가 모두 ‘어리석다’는 뜻이어서, 환자와 가족에게 모멸감을 주고 편견을 유발해 조기 진단과 치료를 방해한다는 거다. 노화에 따른 인지 저하로 나타나는 여러 질병의 특성을 한자가 왜곡한다는 우려도 포함됐다. 치매를 향한 거부감은 과거 국내 설문조사에서도 볼 수 있다. 2014년 보건복지부 의뢰로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수행한 ‘제3차 국가치매관리종합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에 따르면, 일반인 응답자 1000명 중 39.6%와 전문가 응답자 423명 중 39.9%가 치매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질환에 두려움을 갖게 된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불치병이라는 느낌을 준다거나 편견이 걱정된다는 답변도 있었다.
우리와 비슷한 움직임을 보였던 일본은 2004년 국민 의견수렴 등을 거쳐 ‘인지증(認知症)’으로 병명을 바꿨다. 대만은 ‘실지증(失智症)’, 홍콩과 중국도 ‘뇌퇴화증(腦退化症)’처럼 의학적인 요소를 반영해서 변경된 명칭을 쓰고 있다.
◆국회에서도 움직임은 있었지만…흐지부지된 이유는
2017년 당시 20대 국회에서 치매정명을 담은 치매관리법 개정안들이 발의된 적 있지만, 모두 임기만료에 따른 폐기로 결과를 내지 못했다. 권미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치매를 ‘인지장애증’으로 변경하자는 내용으로 발의한 ‘치매관리법 일부개정 법률안’과 관련,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검토보고서에는 “국민 대다수가 치매를 부정적으로 인식할 경우 대체병명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라면서도 “‘인지장애증’을 사용하는 것은 인지기능과 관련된 다른 질병과 혼동될 우려가 있으며, 병명에 ‘장애’를 붙이는 것이 또 다른 편견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는 보건복지부 의견이 적혔다.
김성원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인지저하증’으로 부르자며 발의했던 개정안에는 “명칭 변경 시 초래될 수 있는 사회적 비용, 이미 사용 중인 용어와의 유사성으로 인한 혼란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환자 가족의 고통 경감과 치료율 제고를 위해서는 명칭 변경보다 치매친화적 환경 조성 등 사회적 인식개선이 필요하다”는 보건복지부 의견이 보건복지위원회 검토보고서에 있었다.
취지에는 공감하나 명칭 바꾸기가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관련 기관의 의견은 치매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보이는 ‘이름만 바꾼다고 인식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일부 누리꾼 의견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정명’과 함께 병행할 방법이 있다면…
한편 장양은 과거 보건소에서 60세 이상 어르신을 대상으로 치매검진 봉사활동을 하는 동안 ‘검사’ 자체에 대한 상대방의 적잖은 거부반응을 맞닥뜨리면서 치매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우리가 먼저 치매를 농담의 소재로 삼지 않고, 치매가 의심되는 사람은 먼저 도와줘야 한다”며 “정부 차원에서 ‘치매국가책임제’를 꾸준히 지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펴야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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