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H퀸스’ 뺨치는 아트 빌딩서 삶의 여유 느껴보세요 [이슈 속으로]

서울에도 있는 근사한 명소 어디?

홍지동 W299빌딩
2019년 5월 웅갤러리 등 3곳 동시 개관
평창동 등 강북 미술시장에 인접 장점
공예 포함 다양한 분야 기획 전시 집중

청담동 노아빌딩
1982년 주영갤러리 개관… 새 식구 입점
강남 미술시장 부흥 구심점 역할 자임
최소 1년에 한 번 정도 연합전시 선보여

웅갤러리, 본화랑, 부르지에 히가이 갤러리, 아트아리가 모여 있는 홍지동 W299빌딩. 남제현 선임기자

‘홍지동 W299빌딩과 청담동 노아빌딩을 아시나요?’

H퀸스빌딩과 페더빌딩은 홍콩의 명소다. 갤러리들이 층마다 입점해 한 건물을 가득 채운 아트 빌딩들은 세계적인 작가나 기획자, 전문수집가, 큐레이터, 일반 관람객 등을 끌어들이며 홍콩을 아시아 미술 중심 도시로 부각시켰다.

서울에도 이 같은 아트 빌딩이 생겨나 삶의 여유와 힐링, 생활의 즐거움을 배가하고 있다.

웅갤러리, 본화랑, 부르지에 히가이 갤러리, 아트아리가 활발한 전시를 펼치고 있는 홍지동 W299빌딩과 주영갤러리, 호리아트 스페이스, 아이프&한국미술경영연구소를 갖추며 갤러리 빌딩으로 거듭난 청담동 노아빌딩이 그곳이다.

◇ 홍지동 W299빌딩

W299라는 빌딩 이름은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 299’ 주소에서 따왔다.

2019년 5월 웅갤러리, 본화랑, 브루지에 히가이 갤러리가 동시에 개관전을 개최했다. 세 갤러리 모두 각자의 특성을 살린 전시회 ‘담색물성’, ‘두 가지 시선- 이석주, 지석철’, ‘8960km’를 함께 열어 화제를 모았다.

2020년 7월에는 웅갤러리, 본화랑, 블록체인 미술품 회사 아트아리가 우리나라 최초의 유럽 유학 미술가인 배운성 개인전 ‘1901-1978: 근대를 열다’를 공동 개최했다. 지난 3월 전시도 같은 날 열고 같은 날 닫았다.

‘표면의 깊이’전에서 눈길을 끄는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의외로 강남보다 일반 관람객이 많아요. 평창동, 부암동, 서촌, 삼청동, 인사동 등 강북 미술시장이 발달한 지역과 가까워서 그러나 봅니다. 각각 다른 성격과 스타일의 개성 강한 전시를 한 군데서 여니, 한 번 방문에 네 가지를 보고 가게 됩니다. 시너지효과가 커요.”

한국화랑협회 회장을 역임한 웅갤러리 최웅철 대표가 바로 아트 빌딩 W299를 조성한 주인공이다. 웅갤러리는 1987년 신사동에서 출발해 이곳에 자리 잡았다.

인조반정 주도세력들이 광해군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이 바로 옆이다. 안평대군이 재기를 꿈꾸던 곳이기도 하다. 대원군의 별장이 있던 자리다. 예사롭지 않은 ‘이곳’을 택한 이유를 물었다. “인왕산 줄기의 힘, 그 기운을 받고자 터를 잡았죠. 새바람을 일으키거나 새로운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고 해서. 하하하.”

여기서 한국 미술시장의 융성과 세계화를 꾀하겠다는 뜻으로 들린다.

“요즘엔 단순히 그림 한 점만 찾기보다는 주변에 침대나 탁자 등의 가구, 도자기, 조각상, 이를 비추는 조명까지 리빙감각을 포함한 ‘공간’ 개념을 원하고 있어요. 그림과 함께 주변 전체가 구비된 공간을 구하려는 취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부분보다 패키지를 원하는 거죠.”

웅갤러리는 공예까지 포함한 다채로운 분야의 현대미술을 조망하는 기획 전시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한 달간 ‘색채화의 거장’ 박생광 전시에 이어, 오는 29일부터 다음달 29일까지 ‘공기의 무게’라는 주제를 내걸고 김영주 개인전을 연다.

김영주 작가는 작업노트에 ‘공백’에 대한 사유를 이렇게 적었다.

‘공백을 인식하기에 앞서 그 일에는 먼저 틀이 존재한다. 물리적 틀이건 심리적 틀이건 어떤 것이 응당 있어야 했던 어떤 영역을 먼저 인지하고 그 뒤에 그곳을 채워야 했을 무언가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 공백을 바라보는 순서일 거다. 공백을 바라보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아닌 상태를 바라보는 일과 함께한다. 허공으로 채워진 장소들, 듬직한 시스템 속을 채운 건 오랜 부재가 만들어 낸 두텁고 막연한 공기뿐이다.’

그 공기의 무게를 잴 수 있을까. 공기에 뼈대를 부여하는 일. 오직 예술 언어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고 작가는 생각한다.

지하 1층에는 1988년 개관 이래 관훈동을 지키다 W299빌딩 오픈에 맞춰 옮겨온 본화랑이 들어서 있다.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표면의 깊이’전에 출품된 ‘삶의 연속된 선택의 결과’

이승훈 대표는 어머니 권옥귀 대표의 뒤를 잇는 2세대 갤러리스트로, 원로·중진·신진 작가를 고루 소개하며 우리 미술을 세계에 알리고 있는 ‘부지런한 실력자’다.

“아무래도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되는 이곳(W299)에선 기획에 대한 의견교환과 업무추진이 빠르고 쉽게 풀려가죠. 또 수요자의 수월한 관람을 위해서라도 기획 갤러리가 집중 포진한 아트 빌딩이 유리합니다.”

이 대표는 근대미술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OECD 국가 중 근대미술관이 없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어요. 근대미술품 가격이 오르면 한국 미술시장이 밝아집니다. 훌륭한 근대작가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죠.”

본화랑은 29일부터 6월5일까지 5인 그룹전 ‘도자: 시간과 형식의 하이브리드’를 열고, 동시대 작가들이 전통과 현대의 상호작용 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도자의 양식과 내용 변화를 이끌어 가는지 하이브리드라는 키워드를 적용해 살펴본다. 국가무형문화재 백산 김정옥 사기장과 한국 도예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가 이헌정, 유의정, 주세균, 그리고 유리를 매체로 새 도자예술을 표현하는 이상민의 작품을 선보인다.

1층 브루지에 히가이 갤러리는 프랑스 갤러리의 한국 분점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최웅철 대표와 ‘절친’인 브루지에 히가이 갤러리의 두 공동 대표들은 새로 문을 연다는 W299빌딩 사진만을 보고 함께 식사하던 자리에서 곧장 분점 설립을 결정했다. 에릭 브루지에와 로헝 히가이 두 사람의 성으로 이름 지었다.

분점을 총괄하는 박세리 지사장은 프랑스 어반 아트를 주로 선보인단다. “개관전 ‘8960km’는 파리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뜻하는데, 유럽 어반 아트를 대표하는 미술가 존 마토스 크래시, 파비앙 베르쉐르, 셰퍼드 페어리, 닉 워커, 무슈 샤, 라틀라스, 존원 등을 소개했습니다.”

교류의 장 마련이란 효과가 크다. 프랑스 작가들은 포화 상태인 프랑스 시장에서 벗어나 한국 시장에 진출했고, 한국 작가의 유럽 진출도 용이해졌다. 한국 스트리트 아트의 지알원 작가는 최근 파리 본점 전시에서 호평받았다.

필립 미쇼-뤼즈의 작품 ‘지평선’

5월29일까지 프랑스 작가 필립 미쇼-뤼즈 초대전 ‘힐링 랜스케이프’(Healing Landscape)를 열고 있다. 지평선을 주로 그리는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 그 사이에서 체험할 수 있는 치유의 풍경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먼 곳과 가까운 곳, 나타남과 사라짐, 영원성에 대한 시작점으로서 지평선을 표현한다.

사실 지평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하는 선도 아닌, 점도 아닌 그것은 대지와 하늘의 경계에서 오로지 우리가 일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때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우리가 그간 무한하게만 여겨온 세계의 유한성과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을 다시금 진지하게 사유케 한다.

박세리 브루지에 히가이 갤러리 지사장과 최웅철 웅갤러리 대표, 이승훈 본화랑 대표(왼쪽부터)가 박생광 화백의 작품 앞에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남제현 선임기자

◇ 청담동 노아빌딩

청담동 노아빌딩이 아트 빌딩을 형성한 것은 지난해 5월이다.

1982년 개관한 주영갤러리에 이어 이 빌딩에 호리아트스페이스와 아이프&한국미술경영연구소가 새 식구로 들어왔다. 지하 1층과 1층, 2층, 5층을 주영갤러리가 사용하고 호리아트스페이스가 3층, 아이프&한국미술경영연구소가 4층을 쓴다.

주영갤러리의 조승욱 대표는 미술계의 거인이다.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높지만 나서지를 않는 데다 정중동을 행하는 성품이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아이프매니지먼트는 한국미술경영연구소의 김윤섭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이 건물 전층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전시 기획은 아이프 매니지먼트의 몫이다.

호리아트스페이스는 망원동에서 젊은 작가들을 위한 공간을 운영했던 김나리 대표가 작심하고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설립한 신생 갤러리다. 김 대표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50대 전후 작가들이 보다 나은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도록 후원하고, 상호 성장해가겠다”고 뜻을 밝혔다.

왕성한 전성기, 허리에 해당하는 중반의 작가들이 먼저 안정되어야 시장도 커진다는 설명이다.

사실 그동안 강남의 미술시장은 패션시장이나 명품 영향력 등에 밀려 제대로 된 형세를 구축하지 못했다. 노아빌딩에 이들이 집결한 것은 새로운 부흥의 돌파구를 찾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활기’로 이겨내 보겠다는 것이다. 분위기 조성의 구심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셈이다.

세 갤러리는 아트 빌딩의 출범을 알리면서 공동 전시 ‘청유미감’(淸遊美感)을 개최한 바 있다. 한국적 정서를 담은 권진규, 김환기, 박래현, 이우환 작품 80여점을 선보여 흥행했다.

호리아트스페이스와 아이프 매니지먼트는 지난 15일부터 윤종석 기획초대 개인전 ‘THE DEEP SURFACE 표면의 깊이’를 공동 전시하고 있다. 다음달 14일까지 열린다.

작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눈에 쏙 들어온다. 누군가 탁월한 솜씨로 만들어 놓은 꽃 모양의 풍선은 아주 가벼운 존재이다. 바람이 빠지면 형태를 곧 잃어버린다. 한때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던 후세인도 사형되어 한순간 사라졌다. 진실은 시간이 지나야 보인다. 삶은 그렇게 가볍다. 후세인의 황금권총과 꽃 풍선을 한데 묶어 권력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개와 늑대의 사진을 쓴 ‘삶의 연속된 선택의 결과’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친구가 되거나 혹은 적이 되는 상반된 운명을 말한다. 같은 이유로 노벨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의 용도와 역할을 하게 된다. 미묘한 감정을 전하는 수작들이다. 

주영갤러리에서는 사전 예약을 통해 소장품을 감상할 수 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세 개 갤러리가 연합 전시를 선보인다. 아이프 매니지먼트와 호리아트스페이스의 공동 전시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열릴 예정이다.

김신성 선임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