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대단지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택배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이달 초 아파트 측이 택배차량 지상 출입을 전면 금지한 이후 어느덧 한달간 이어지고 있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와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 간 갈등은 소송전으로까지 확전되는 형국이다.
택배노조 측은 대화에 임하지 않는 아파트입주자대표와 저탑용 배달차량 이용에 합의한 CJ대한통운사를 동시에 규탄하고 나선 상태다. 택배노조 측은 아파트 앞 지하철 5호선 상일동역 1번 출구와 서울 중구 CJ대한통운사 앞에 각각 농성장을 설치하고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30일 택배노조에 따르면 노조는 다음달 1일 대의원회의를 열고 찬반투표로 총파업 가부를 결정한다.
노조원들의 과반 이상 동의로 총파업이 가결될 경우 이번 택배 갈등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그에 앞서 정부 등 제3자가 개입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적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정부는 '사적 영역'이라는 이유로 일단 한 발 물러서 있는 상태다.
택배노조는 지난 29일 CJ대한통운 강신호 대표이사 등을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고발했다. 택배기사에 근골격계 등 질환을 유발할 수 있음에도 CJ대한통운이 이 아파트와 저상택배차량 도입에 합의한 것은 산안법을 위반한 것이라는 게 택배노조 측 주장이다.
또 지난 28일에는 아파트 측이 택배노조원 2명을 주거침입 혐의로 고발한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아파트 측은 택배노조원 2명이 집 앞에 인쇄물을 붙인다는 이유로 처벌을 원한다며 신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노조원들은 택배기사의 노동 현실을 입주민에게 알리는 호소문을 작성해 집집마다 부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택배노조 측은 다음 달 1일 대의원대회에서 총파업을 포함한 찬반 투표를 통해 최종 투쟁 방향을 확정할 예정이다. 총파업이 가결될 경우 노조 측은 전국 아파트를 대상으로 '배송 보이콧' 투쟁을 벌이게 된다. 택배노조 측은 가결시 일주일 정도 시간을 가진 후 다음 달 11일쯤 전면적 투쟁에 나설 계획을 세운 것으로 파악됐다.
택배노조 측은 뉴시스와 통화에서 "택배사들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노동조합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라며 "국민에게 불편을 초래하겠지만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했다. 그러면서 "총파업 전까지 교섭시간을 최대한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택배노조 측이 '전국 배송 총파업'을 결단하기엔 명분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주가 아닌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힘을 못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국 아파트에서 택배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한 것이 아닌 일부 아파트에 해당되는 국지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총파업의 명분이 떨어진다는 시선도 나온다. 택배 노조 측이 총파업 시행에 앞서 교섭기간을 둔 것 또한 이러한 역풍을 감안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배송 갈등이 법적 영역으로까지 번지면서 이제 정부나 지자체 등 제3자의 개입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달 간 택배노조 측이 아파트 측에 대화를 요청했지만 불응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상호 간 합의로 풀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또 이번 갈등에 여론까지 가세하면서 갈등 주체끼리 문제를 풀 수 있는 여지가 줄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신중한 입장이다. 한 아파트와 택배사 간 갈등은 사적 영역이기 때문에 함부로 개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정부가 나선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며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택배사로 하여금 사안이 원만히 해결되도록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 정부 관계자는 "이런 문제는 지방자치단체에서 나서야 된다고 본다"며 "그래야 교섭 내용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병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갈등이 장기화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나서서 중재를 해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구 국회의원이나 구청장 등이 나설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적 영역이기 때문에 중재에 나서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총 5000세대 규모로 알려진 해당 아파트는 주민 안전 등을 이유로 지난 1일부터 택배차량의 단지 내 지상도로 진입을 막았다.
하지만 해당 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 높이가 2.3m라 진입하지 못하는 택배차량이 있어 논란이 불거졌다. 일반 택배차량의 높이는 2.5~2.7m다. 이 때문에 택배기사들은 단지 지상도로에서 손수레를 이용해 배송하거나,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려면 사비로 저탑차량으로 바꿔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택배노조는 이같은 행동을 '갑질'로 규정하고 대응에 나서고 있다. 아파트가 일방적으로 진행한 조치와 요구사항이며 결정 과정에서 택배기사들의 의견은 배제됐다는 것이다.
아파트 측에서는 1년 전부터 택배차량의 지상 진입 금지를 알리며 충분한 계도 기간을 제공했다는 입장이다.
이처럼 양측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지난 1일과 14일 이 아파트 후문 입구에 물품 1000여개가 쌓이는 '택배 대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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