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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를 일군 인생 동반자, 그들의 삶 조명

입력 : 2021-08-03 02:00:00 수정 : 2021-08-02 19: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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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출간 ‘조선사람들의 동행’ 2題

한국회화사 걸작 ‘몽유도원도’
안견이 안평대군 꿈 듣고 그린 그림
왕자의 패기·화가의 재치 어우러져

일제강점기 항일투쟁 동지
장지연 사설 ‘시일야방성대곡’ 게재
박은식, 비슷한 논조 시대정신 공유
당대 최고의 수집자인 안평대군과 화가인 안견의 동행이 만들어 낸 걸작 ‘몽유도원도’.

“지금 당신 곁에 누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당신이 떠올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가족, 친구, 회사 동료, 학교 선후배…. 누구이든 당신의 인생에 큰 의미를 가진 사람일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런 질문을 던지며 시작하는 근간 ‘조선사람들의 동행’(글항아리)은 조선의 역사를 일군 동반자들을 소개한다. “함께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국왕과 신하에서부터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뜻을 함께한 동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줄곧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동행도 있으나 끝내는 파국을 맞는 관계도 없지 않았다.

◆최고의 그림을 낳은 안평과 안견의 동행

한국회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몽유도원도’는 안견이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꾼 꿈을 듣고 그린 작품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푹 잠에 들어 꿈 속에서 보았던 이상향을 “안견으로 하여금 그림으로 만들게 했다”는 안평대군의 고백은 두 사람이 특별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안평대군과 안견은 “자신들이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시절”을 동행했다. “시문과 서화 및 음악에 조예가 깊은 청년”이던 안평대군은 “동아시아 예술사에서 주목할 만한 콜렉터”였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그의 수장고에는 서화가 222축이 있었는데 상당수가 고개지, 오도자, 왕유 등 중국의 이름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었다.

안견은 안평대군 시절 가장 뛰어난 화가였다. 지금 그의 진작으로 전하는 건 몽유도원도뿐이지만 당대의 기록을 보면 안평대군의 초상화, 세종의 명령으로 만든 ‘팔준도’ 등 왕실 행사의 중요한 그림을 도맡아 그린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명성은 후대로도 이어져 그의 소폭 그림들에 대해 “자연의 진수를 그대로 그려내 꽃과 풀에서 향내가 난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였다.

안견에게 안평대군은 든든한 후원자였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소장품을 살피고 모사하며 최고의 화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안평대군은 안견의 작품 중 잘된 것을 골라 자신의 것으로 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몽유도원도는 “젊은 왕자의 패기와 포부, 새 왕조를 주도하는 시절의 자부심, 여기에 총명한 화가의 재치와 노력이 어우러진 화면”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별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안평대군이 구입한 고급 먹을 안견이 훔치려다 들켜 인연을 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전하는 기록은 안견이 ‘시사(時事)가 위태로움’을 알아 스스로 결별을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안평대군의 형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의 기미를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수양대군과 대립했던 안평대군은 물론 가족, 수하들은 큰 화를 면치 못했으나 안견은 그렇지 않았다.

언론인이자 항일투사로서 뜻을 함께했던 박은식 선생과 장지연 선생.

◆항일을 함께한 동지, 장지연과 박은식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같은 달 20일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이 게재됐다. 한국인 모두를 “타인의 노예로 몰아넣은 개돼지만도 못한” 대신들을 규탄하며 “우리 2000만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라고 울부짖은 이 글은 항일 여론에 불을 지른 명문이었다.

다음 달 28일, 박은식의 사설 ‘시일에 우 방성대곡’이 뒤를 이었다. 장지연이 수감되고,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비슷한 제목, 내용으로 투쟁의 바통을 넘겨받은 것이다.

책은 박은식과 장지연의 관계를 “한국 근대 언론사에의 중요한 조합”이라며 ‘지동도합’(志同道合)이란 말로 평한다. “뜻이 같고 도가 합하는 사이”라는 의미로 인생 동반자로서는 최상의 경지를 표현할 때 쓰인다.

장지연과 박은식은 시골 출신의 선비지만 최고의 문필로 주목받았다. 당대 최고의 세도를 구가하던 여흥 민씨 가문에 의탁해 문객(文客)으로 출세의 길을 닦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능력이 있어서였다.

이들은 신문사의 논객이자 항일투쟁을 이끈 동지였다. 1905년 장지연이 외세의 침략을 받은 이집트의 비극적 역사를 정리한 ‘애급근세사’를 번역해 책을 내자 박은식은 서문을 썼다. 이는 “두 사람의 우의와 (각자가 소속돼 있던) 두 신문의 협력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을사늑약 이듬해인 1906년 한국의 자강을 부르짖는 사회단체 대한자강회가 설립되었을 때는 이곳에서 함께 활동하며 자강 사상을 고취하는 논설들을 발표했다. 책은 “박은식과 장지연은 자강의 시대정신을 공유했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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