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오후 충남 안흥 소재 국방과학연구소(ADD) 종합시험장. 바다와 인접한 시험장 한켠에 설치된 발사대에서 작고 날렵한 외형을 지닌 미사일 한 발이 솟아올랐다.
발사대에서 사출된 직후 엔진을 점화한 미사일은 빠른 속도로 상승해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바다 가운데에 있던 바지선에 접근, 선박 위에 설치된 그물을 날카롭게 찢었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국산 초음속 순항미사일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음속에 미치지 못하는 아음속 순항미사일만 갖추고 있던 한국 입장에서 초음속 순항미사일은 동북아 해상 패권 다툼에서 상당한 이점을 제공한다는 평가다.
하지만 주변국들이 음속의 5배가 넘는 속도를 자랑하는 극초음속 미사일을 실전배치할 태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한발 늦은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빠른 속도로 방공망 돌파 가능
시험발사를 통해 공개된 국산 초음속 순항미사일은 미사일 앞부분에 공기흡입구가 설치되어 있었다.
미사일 동체 옆부분에 공기흡입구가 장착된 해성 대함미사일이나 공기흡입구가 눈에쉽게 띄지 않는 육군 현무-3C 순항미사일과는 전혀 달랐다. 전반적으로는 러시아가 만든 P-800 야혼트 초음속 순항미사일과 매우 유사하다.
실제로 P-800은 냉전 이후 러시아산 무기도입 사업이었던 불곰사업을 통해 관련 기술이 국내에 반입, 국산 초음속 순항미사일의 기술적 토대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는 오닉스라고 불리는 P-800은 사거리가 300~800㎞에 달하는 초음속 대함 순항미사일이다. 1990년대 등장했던 P-270 모스키토 초음속 순항미사일은 요격미사일을 회피하는 시 스키밍 능력이 없었고 사거리도 짧았다. 단순히 빠른 속도로 적함에 접근해 타격하는 방식이었다.
반면 P-800은 사거리가 늘어났고 무게는 줄어들었으며 시 스키밍 능력을 갖춘 초음속 순항미사일이다.
미국산 하푼 대함미사일보다 위력도 강하다. 순항미사일이 음속의 수배에 달하는 속도로 날아가면 운동에너지도 그만큼 높아진다. 크고 무거운 탄두를 탑재하지 않아도 강력한 운동에너지로 적함을 무력화한다. 특히 항공모함이나 강습상륙함 등 대형 함정에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
P-800은 터보팬 엔진을 쓰는 해성 등과 달리 고체로켓 부스터와 램제트 엔진을 탑재한다.
렘제트는 압축기나 터빈이 없다. 고속 비행으로 인한 기압으로 공기를 압축, 연료를 분사해 추진력을 얻는다. 구조가 간단하고 크기가 작다. 다만 낮은 속도에서는 효율이 떨어져 비행체가 초음속에 도달하기까지는 다른 추진기관을 써야 한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부터 국방과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초음속 순항미사일 개발이 시작됐다. 중국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에 걸쳐 러시아로부터 도입한 항저우급 구축함에 P-270 미사일이 장착되면서 동북아에 초음속 순항미사일 위협이 본격화된 직후다.
P-800 관련 기술이 도입됐지만, 다양한 플랫폼에 탑재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소형화와 경량화가 필요했다.
램제트 엔진과 고성능 추진체, 초고속 비행 도중 미사일 탄두부 주변에서 발생할 고열로부터 미사일 시스템을 보호하는 기술 등을 포함한 핵심 기술 국산화도 필요했다.
데이터링크 유도체계와 열영상 장비, 레이더 등도 추가해야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초고속비행체 특화연구센터를 설립하는 등 핵심기술 확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거리는 300~500㎞로 추산되나 성능개량을 통한 연장 가능성도 있다. P-800 기술을 도입해 브라모스 순항미사일을 만든 인도는 사거리를 400㎞에서 800㎞까지 늘릴 예정이다.
◆한국보다 한발 앞서는 주변국들
국산 초음속 순항미사일 개발은 국방과학기술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지만, 주변국들은 한국보다 한 발 앞서 나가고 있다. 2020년대에는 음속의 5배가 넘는 속도로 날아가는 극초음속 미사일 실전배치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대만은 10여년 전에 초음속 순항미사일 슝펑-3를 개발했다. 대만 해군 주요 함정에 장착되고 있으며, 사거리도 400㎞로 연장됐다.
러시아는 킨잘 극초음속 미사일을 운용중이다. 킨잘은 MiG-31K 전투기에 탑재돼 공중에서 발사된 뒤 자체 추진체를 이용해 극초음속으로 비행, 목표물을 타격하는 공대지, 공대함 순항 미사일이다. 핵탄두 장착도 가능하다. 사거리는 2000㎞에 달한다.
러시아는 킨잘의 비행 속도가 마하 10(시속 1만2240㎞)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킨잘은 러시아와 서방측간의 갈등 구도 속에서 러시아의 ‘독침’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러시아와 영국 언론들은 영국 해군 퀸 엘리자베스 항공모함 전투단이 동지중해에서 작전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킨잘을 탑재한 MIG-31K 2대를 시리아 흐메이밈 공군기지에 배치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킨잘을 장착한 채 이륙하는 MIG-31K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중국은 2019년 10월 건국 70주년 열병식에서 마하 10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둥펑(DF)-17 극초음속 미사일을 공개했다. 극초음속 무기에 탑재될 스크램제트 엔진을 최대 출력에서 10분간 가동하는데 성공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극초음속 무기로 인도태평양을 장악한 미군을 격파하거나 무력화하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육군 패트리엇(PAC-3)으로 요격해도 음속의 5배가 넘는 속도로 잔해가 떨어지면 지상 표적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이지스 시스템을 갖춘 해군도 마찬가지다.
미국도 극초음속 무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따르면, 바이든 행정부가 의회에 요청한 2022 회계년도 국방예산에서 극초음속 무기 개발에 38억 달러가 배정됐다. 2021 회계연도보다 4억 달러, 2020년 회계연도보다 12억 달러가 늘어났다.
미군의 토마호크나 재즘(JASSM) 순항미사일은 800㎞를 비행하는데 1시간이 걸리지만, 극초음속 무기는 10분 이내에 날아갈 수 있다. 미국이 극초음속 무기에 주목하는 이유다.
마이크 화이트 미 국방부 연구·공학기술 차관실 직속 극초음속미사일 수석국장은 최근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주최 화상대담에서 “미국이 개발 중인 극초음속 무기체계는 활공체(HGV)와 순항미사일(HCM)계열인데, 순항미사일은 추진체 운동력이 활강체보다 덜 요구된다”며 “적성국 역량에 대한 수적 우위를 확보하려면 극초음속 순항미사일 개발을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새로 개발될 극초음속 순항미사일은 F-15EX 전투기에 탑재될 예정이다. 2020년대 후반에는 해군 버지니아급 핵추진잠수함에도 장착될 수 있다.
동맹국과 공동개발도 진행중이다. 미국은 호주와 함께 극초음속 순항미사일의 핵심 기술인 공기흡입식 엔진 개발을 위해 2019년부터 ‘남십자성 통합비행연구실험’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극초음속 무기 개발을 진행중이다. 현재 탐색개발 단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반도처럼 종심이 짧은 지역에서 북한 탄도미사일 이동식발사차량(TEL)의 움직임을 포착, 타격하려면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
수백㎞를 수 분 안에 날아가는 극초음속 무기는 북한 도발을 억제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초음속 순항미사일 외에도 극초음속 무기 개발을 가속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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