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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병원 갤러리에서 만나는 낙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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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3-25 22:49:23 수정 : 2022-03-25 22:4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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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일상서 놓쳤던 여유로움
환자복 차림으로나마 찾게 돼
작품 바라보는 표정마다 평온
못다 한 추억 만들어 나가기도

요즘 웬만한 대형병원에는 병원 안에 갤러리가 있다. 개인 병원이나 한의원에서도 병원 내에 갤러리를 운영하는 곳이 늘고 있다. 병에 대한 압박감이나 불안함을 미술작품으로 해소하고, 병원이라는 공간 자체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서울아산병원은 1996년부터 갤러리를 운영하고 있는데 대형병원 갤러리 중 가장 오래되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은 2009년부터 ‘아트스페이스’라는 갤러리를 운영 중이며, 서울대치과병원에는 2017년부터 ‘갤러리치유’가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대서울병원은 2019년부터 ‘아트큐브’라는 갤러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고 치료 중이던 언니는 입원한 병원의 갤러리에 자주 내려갔다. 평소에 크게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니는 ‘동구 밖’이라는 조각 작품 앞에 오래 서있었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었다. 아이 셋이 나란히 앉아 동그랗게 눈을 뜨고 하늘을 응시하는, 노란 사암으로 구성된 이태근 조각가의 작품이었다. 언니에게도 이런 동구 밖의 장면쯤은 추억으로 남아 있을 거다.

천수호 시인

7년 전엔 나의 친구도 그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했다. 친구의 병이 깊어져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게 되었을 때도 병원 안 갤러리에 들르는 걸 좋아했다. 그렇게 친구와 언니는 그 병원의 갤러리에서 나와의 추억을 만들어 놓고, 시간차를 두고 둘 다 하늘로 주소를 옮겼다. 이런 나를 미리 우려했던 언니는 갤러리에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병원에서 추억을 만들지 마.”

대형병원의 갤러리는 이렇듯 환자가 가족이나 지인들과 못다 한 추억을 만드는 장소다. 병원 갤러리에서 우리처럼 서 있는 환자와 가족들을 종종 보았다. 함께 그림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놀랍게도 여유로워 보였다. 그동안 바쁜 일상에서 놓치고 살아왔던 여유를 환자복 차림으로나마 찾게 된다. 작품을 바라보는 순간만은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인 것처럼 그림 앞에 선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롭다.

“언제쯤 벚꽃이 피려나? 참, 산수유가 좀 먼저 피지? 그지?” 김선우 전을 보면서 언니가 물었다. 산수유와 벚꽃 그림이 갤러리 벽면을 가득 메웠다. 상처가 있기도 하고 가지가 잘리기도 한 검은 벚나무에 함박눈처럼 뒤덮인 벚꽃과, 하늘을 가득 메운 노란 산수유 그림에 압도당하며 봄을 기다리던 언니의 모습이 좀 아득해 보였다. 또 어느 날인가 보았던 심성희 화가의 ‘빨래가 널린 풍경전’을 언니는 참 좋아했다. 평소 가사(家事)에 부지런했던 언니는 흰 꽃가지가 휘늘어진 2층 건물의 빨랫줄 그림 앞에 오래 서 있었다. 곰인형, 토끼인형과 나란히 널린 희고 푸른 수건들…. 그 그림 앞에서 언니는 투병하느라 오래 잊고 있던 일상을 떠올렸다.

아픔이 없는 그림 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고통의 현실을 잊는 특효처방이었을까.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꽃들이 그득하고 꽃바람이 불고 빨래가 날리고 따스한 행복의 빛을 쬐는 여인들이 그림 속에는 있으니까. 거기가 낙원이니까.

바슐라르는 ‘꿈꿀 권리’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화가마다에 자신의 낙원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색깔을 조화시키는 것을 체득하게 된 사람은 확실히 한 세계의 화합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낙원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한 장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색깔들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화해시킨다는 그의 말을 곱씹어보면 우리는 한 장의 그림 앞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불화했던 세상과 화해할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순수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어쩌면 병원 갤러리에 선 환자들은 그 화가가 꾼 꿈의 낙원 속으로 빠져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일대기와 고요히 대화하며 한생을 뒤돌아보게 하는 병원 벽면에 걸린 그림 한 장, 그 그림과 함께 추억을 만들어 놓고 떠난 사람들은 지금 어떤 낙원에 있는 걸까. 환자들이 그 이후의 낙원을 행복하게 꿈꿀 수 있도록 병원 갤러리가 좀 더 다정한 역할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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